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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29. 2015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서둘러 역으로 뛰어 들어갔다.

갑작스레 비가 내렸다. 서둘러 역으로 뛰어들어갔다. 금세 거세진 비는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한 귀갓길, 조금만 늦었어도 비에 젖은 채 전철을 탈 뻔했다.
승강장 의자에 앉아 차를 기다렸다. 의자 끝엔 우산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 차를 기다리다 놓고 간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주워 들고 싶었지만 혹시 주인이 찾으러 올지 몰라 선뜻 집을 수 없었다. 이내 차가 도착했고, 난 망설임 끝에 우산을 들었다. 비를 맞지 않아도 되겠구나, 안심했다. 차 안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끝자리에 앉아 우산을 몸과 손잡이 사이에 비스듬히 세웠다.
너에겐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네게 호감을 느꼈을 때도, 한 해가 지나 그 이상의 감정이 되었을 때도, 너의 곁엔 늘 그 사람이 있었다. 잊어야 했다. 사랑하는 이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건 옮지 않다 생각했다. 마주칠 것 같은 자리는 피했고 사적인 연락 역시 끊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했다. 마음만큼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없지만 상황은 바꿀 수 있으니까. 바뀐 상황에 마음도 적응할 테니까. 거의 성공했다 믿을 무렵, 넌 그 사람과 헤어졌다. 오랜 노력은 산산이 부서졌고, 그걸 오히려 반기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건 포기하지 말라는 뜻인지도 모른다고, 구차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다. 넌 꽤 긴 시간을 그 사람 때문에 힘들어했다. 난 그런 너의 곁을 맴돌았고 결국, 고백했다.

위태로운 만남이었다. 너의 얼굴에선 한 치의 행복도 느낄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날 만났던 걸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아마 그때의 네 감정은 너조차 몰랐을 것이다. 그런 널 보며 난 늘 불안했고 미안했다. 그토록 오래 기다렸는데 곁에 있는 널 보며 내가 느낀 건 죄책감뿐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엔 어떻게도 완벽히 지울 수 없는 그림자처럼 묘한 안도감이 남았다. 그렇게 널 놓지 못했다. 너와 만날 때면 죄책감과 안도감 사이의 기묘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고, 난 조금씩 나 자신에게 지쳐갔다. 간신히 이어졌던 두 사람 사이의 끈은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리곤 아주 당연한 일처럼 너와의 연락이 끊겼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깨 보니 전철은 내려야 하는 역에 들어서고 있었다.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우산이 생각나 옆을 돌아보았지만 우산은 없었다.
역을 나서니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옷깃을 여미고 역을 나섰다. 우산이 없이도 그런대로 맞을 만한 비였다.


사진_raffaes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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