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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Sep 30. 2015

엄마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난 모르겠다.

어머님이 누구시니?
그건 왜요?
아, 아니, 그게 그러니까…
눈은 계속 당신과 나 사이의 바닥 어딘가를 헤매고, 입은 몇 번이고 어떤 말을 하려다 멈춘다. 난 저런 표정은 교무실에서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생각해도 부끄러운 잘못이기에 선뜻 선생님께 털어놓지 못하고 망설이는 학생의 표정이 딱 저랬다. 그때 난 그 아이를 보면서 곧 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다행히 당신은 울지 않았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걸까. 당신은 바쁘게 움직이던 눈과 입을 일순간 멈추고 이내 깊이 한숨을 한 번 내쉬더니, 신기할 정도로 순식간에 침착해져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처음 본 학생한테 실례가 많았구나.
아시면 됐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돌아서 걸었다. 끝까지 잘할 수 있었는데, 끝내 말끝이 떨렸다. 당신이 눈치챘을까? 지금 내 얼굴이 어떤 모양인지 모르겠다. 멀어지는 등 뒤로 당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

순전히 우연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다 낯선 상자를 발견했다. 엄마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정리했으니 모르는 상자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다른 짐이 섞인 건 아닐까 싶어 확인차 열어 보았다. 누군가의 품에 기대 밝게 웃는 엄마의 사진 한 장 아래로 수십 통의 편지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편지를 꺼내 보니 엄마와 낯선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엄마가 부르는 소리에 서둘러 편지를 넣고 상자를 닫았다. 엄마가 있는 쪽으로 가면서 방금 본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 보았다.
엄마는 내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당신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거다. 정말이지, 엄마는 나를 너무 잘 안다.
검색 창에 이름을 치고 세 페이지를 넘기자 어느 회사 사이트에서 사진의 그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이는 더 들어 보였지만 같은 사람이 분명했다.
회사는 집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무작정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다행히 퇴근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건물 앞을 서성이며 드나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을 찾았다. 하나같이 어두운 정장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모두가 서로를 아는 듯, 하지만 또 전혀 모르는 듯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학교 앞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제 당신의 사진을 보았을 때부터, 시간은 제멋대로 느려졌다가 빨라지길 반복했다. 어느덧 시간은 또 혼자 달려 8시를 훌쩍 지나 있었다.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도, 그 다음 날도 난 학교가 끝나면 회사 앞으로 가 당신을 찾았다. 이틀 동안은 신경 쓰는 사람 하나 없었는데, 이젠 얼굴을 기억하기 시작한 건지 어제는 몇 사람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다 가곤 했다. 무언가 충고라도 하려는 듯 다가오다가 혀를 차며 간 사람도 있었다.
엄마는 내게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진 않았다. 그저 좋은 사람이라고만 했다. 말끝에 믿기 어렵겠지만, 이라고 작게 덧붙이긴 했지만.
삼일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당신이 이 회사에 다니긴 하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몇 번이고 보았던 사이트의 사진은 올라온 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최근에 회사를 옮기지 않은 이상 이곳에 다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휴가라도 낸 걸까. 아니면 내가 오기 전이나 간 다음에야 회사를 나서는 걸까. 건물 안에 들어가 볼까? 들어간 다음엔 어떻게 하지? 선뜻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당신의 사진을 본 다음부터 엉망이 된 건 시간만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다. 생각의 바닥이 사라진 느낌이다. 어차피 곧 주말이니 일단 내일까지만 이 앞에서 찾아보고 다음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회사 건물을 나서는 당신을 보았다.
답안지를 맞춰보듯 줄지어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며 시선을 옮기다 때마침 내가 있는 쪽을 본 당신과 눈이 마주쳤다. 틀려선 안 되는 문제를 틀린 듯, 놀란 마음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당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면 또 눈이 마주칠 것 같아 애써 태연한 척 휴대전화를 꺼내 괜스레 이런저런 어플을 눌러 보았다. 그것도 잠시, 당신이 내게 다가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난 그 순간, 어째서 이런 일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건지, 세상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의 발걸음을 대신하듯 내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도망이라도 칠까, 순간 생각을 하다 접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학생.
당신이 날 불렀다.
예?
조금 전까진 그렇게 떨렸는데, 정작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니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평소보다 더 차갑게 답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의 동요도 얼굴에 비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에 비해 당신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려는 듯 어딘가가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미안한데 그…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니?
엄마는 당신이 떠나고 몇 년 뒤 내 이름을 바꿨다. 굳이 당신의 성과 당신의 아버지가 지은 이름으로 날 부르고 싶지 않았을 거다. 그건 나는 물론 엄마와 당신 사이의 놓인 가장 굵은 끈 하나를 잘라 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예쁜 이름이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이름을 듣자 당신은 조금 전보다 더 혼란스런 눈빛이다. 눈과 입이 서로 다른 감정을 말하고 있다. 그 표정이 보는 나 역시 초조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할 말 있으신 거 아니면 가 볼게요.
급히 몸을 돌리려는데 당신이 말했다.
아니, 잠깐만.
못 들은 척 가도 되는데, 그러려고 생각했는데 몸은 제멋대로 반쯤 돌아선 채로 멈춰 섰다. 왜 그냥 가지 못한 거야, 대체 무얼 기대하고! 이러다 들키면 안 되는데!
어머니, 그러니까 학생, 어머님이 누구시니?

*

확신하진 못했지만, 당신은 날 한눈에 알아봤다. 그리고는 내게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직설적인 질문을 했다. 대담하다 못해 멍청하게까지 느껴지는, 내 이름과 엄마가 누군지 묻던 당신의 목소리가 집에 돌아와 씻고 자리에 누운 지금까지도 귀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에게는 계속 숨겨야 하는 걸까. 아니 난 애초에 당신을 만나서 뭘 하고 싶었던 거지. 혹시라도 당신이 찾아오면 그땐 어쩌지. 당신을 만난 이후 시간과 생각은 한층 더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난 모르겠다.
엄마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사진 : Ikhlasul A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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