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이 Sep 30. 2015

평화롭게 잠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

난 비행기가 추락하길 바라며 앉아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사람들 사이에서 난 비행기가 추락하길 바라며 앉아 있었다. 못된 생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 그랬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불가항력으로라도 도착할 수 없길. 이 사람들은 아무 죄 없으니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다고 저는 다쳐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아니 차라리 바다 한가운데서 실종이라도 되게 해주세요. 이 사람들 말고 저만요. 말이 안 되는 걸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기에, 부질없는 기도를 반복했다.

비행기는 내 바람과 상관없이 순조롭게 공항에 도착했다. 지극히 평온한 비행이었다. 한 번의 덜컹거림조차 없이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을 때는 나도 모르게 조종사를 원망했다.

비행기에 탈 때부터 심심치 않게 들리던 익숙한 언어는,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당연한 것이 되었다. 돌아왔다는 것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입안에 고인 침에서 쓴맛이 났다.

공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들뜬 공기가 불편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건 길게 늘어선 택시 행렬이었다. 먹이를 나르기 위해 줄을 선 개미떼 같아 한숨이 나왔다. 택시 문을 열며, 어쩌면 비행기에 탄 순간부터 선택의 기회는 내게서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곳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많은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

괜스레 말이라도 걸어올까, 목적지를 스마트폰에 적어 기사 아저씨에게 보여드렸다. 생각대로 된 건지, 아니면 시간이 시간인지라 지치셨던 건지, 아저씨는 묵묵히 운전만 하셨다. 택시 안엔 라디오 소리만 울렸다. 이런 목소리와 음악을 듣고 어떻게 졸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노곤한 방송이었다. 물론 아저씨는 졸지 않으셨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뜬 눈으로 비행을 마쳤음에도 잠은커녕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지는 긴장감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익숙한 곡이 나와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곳을 떠나기 일 년 전쯤에 나온 곡이다. 라디오 코너의 배경음악으로 쓰여 귀에는 익지만, 같은 이유로 꽤 오래 제목을 몰랐던 음악이다.

생각해보면 그를 만난 것도 이 곡 때문이었다. 음반 가게를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앨범을 집어 든 순간, 옆에 있던 그가 음반을 가리키며 혹시 이 뮤지션과 같은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얼결에 끄덕이는 날 보면 그는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그 나라엔 이런 뮤지션이 많냐며, 좋은 앨범 좀 추천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 역시 아는 건 이 사람밖에 없다고, 이미 오래전에 떠나온 곳이라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내가 미안할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의 표정이 너무 솔직해 난 하마터면 미안하다 할 뻔했다. 다행히 그는 이내, 장난스러운 이름이 흥미로워 듣기 시작했는데 음악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며, 그 뮤지션과 음악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눈을 떴을 때 택시는 이미 도심에 들어서 있었다. 가로수보다 많은 가로등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곳, 듬성듬성 불이 켜진 빌딩들이 삶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곳. 돌아오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곳.

다시, 서울이다.


2013.04.25.19:03.

작가의 이전글 엄마는 당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