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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Nov 13. 2015

꿈을 꾼 거라고 말해줘요.

오늘이 며칠이죠.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꿈을 꾼 거라고 말해줘요. 잠 기운이 떨쳐지지 않아 멍하니 천장만 보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렸어요.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여전히 들리는 이 소리는 대체 뭔가요. 푸르고 둥근 무늬가 점점 커지고 있어요. 손톱만 했던 것이 어느덧 손바닥 두세 개를 합친 것만큼 커졌어요. 천장 귀퉁이에서 시작한 푸른 점이 천장을 덮으면 여기서도 하늘을 볼 수 있을까요. 오늘이 며칠이죠. 여기 온 지 얼마나 되었나요. 시간을 헤아려봤자 소용없다고 당신이 그랬잖아요. 그냥 하루도 지나지 않은 듯 혹은  몇십 년이 흐른 듯 그렇게 지내면 된다고. 어차피 여긴 죽은 것뿐이니 시간은 의미없다고. 그래요, 오늘이 며칠이고 여기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냈는지 뭐가 중요하겠어요. 살아있는 건 저 곰팡이뿐인가 봐요. 모두 죽었는데 곰팡이만 자라고 있어요.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걸요. 문 밖에 있다고 모를 것 같나요. 당신의 목소리는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에요. 솔직히 나보다 심하죠.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요. 나보다 당신이 이곳에 오래 있었으니 당연하잖아요. 여기서 낮과 밤을 구분하는 건 멍청한 짓이겠지만 지금은 왠지 새벽 같아요. 새벽만 되면 느낄 수 있는 기분 있잖아요. 아무 이유 없이 외롭고 말이 많아지고, 따뜻한 방에 있어도 몸을 감싸 안게 되는 그런 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거짓말하지 마요. 이곳에 와서 지금처럼 말이 많은 당신은 본 적이 없는 걸요. 조금 더 잘 걸 그랬어요. 너무 일찍 깬 것 같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했는데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이젠 졸리지 않아요. 당신은 더 안 자도 괜찮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요. 당신이 잠든다고 내가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당신이 없어도 난 나갈 수 없어요. 당신이 가장 잘 알잖아요. 내가 무슨 수로 여기서 나가겠어요. 혹시, 나간 사람이 있었나요. 당신이 잠든 사이에 누군가 나간 적이 있었던 건가요. 누구죠. 아니 어떻게 나간 거죠. 여긴 열쇠도 없잖아요. 벽이라도 뚫고 나간 건가요. 유령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아니면 되는 거군요. 유령. 그래, 유령이 되면 나갈 수 있는 거죠. 유령에게 벽이나 문 따위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냥 스르륵. 스쳐 지나가듯 나가면 되니까. 그런 거군요. 당신이 잠든 사이 누군가 이 안에서 죽은 거죠. 어떻게 죽었나요. 벽에 머리를 부딪쳤나요. 아니면 이불보를 묶어 목을 맸나요. 그것도 아니면. 돌조각을 갈아 손목을 그은 건가요. 하긴 사람이 죽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거니까요. 스스로 목을 졸라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인데 어떻게든 못 죽겠어요. 그랬군요. 그 사람은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 스스로를 죽인 거군요. 아니. 사람이 두 번 죽지는 않잖아요. 이곳에 온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얻는 건가요.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농담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독하진 못하다고요. 당신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멀쩡하게 말도 하고 잠도 자는 걸요. 그리고 나가 봐야 뭐하겠어요. 이곳에 있는 것보다 나아질 거란 보장도 없는데. 딱히 갈 곳도 없고 만나야 할 사람도 없으니까요. 그냥 이곳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적어도 이곳에선 굶어 죽을 일은 없잖아요. 따뜻하진 않아도 등 대고 누울 곳도 있고,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로 수다 떨 상대도 있으니까요. 당신이 더 잘 알잖아요. 이곳에 오는 사람들 처지가 다 비슷하다는 걸. 어쩌면 밖에서 딱히 갈 곳이 없기에 이곳으로 오는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에게 잊힌 사람이 쓸쓸함을 견디다 못해 오게 되는 지도 모르죠. 제가 너무 감상적인가요.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이제와 불쌍한 척하는 것 같아 가증스럽나요. 어쩌겠어요. 후회하고 자책해봤자 달라질 것도 없는데. 어설프게 반성하느니 차라리 자기연민에 빠지는 게 나아요. 그 편이 서로 편하니까. 원망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모두 말이죠. 난 그렇다 쳐도 당신은 어쩌다 이런 곳에 오게 되었나요. 처한 상황은 당신이나 나나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혹시 당신도, 아니요.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은 나보다 이곳에 훨씬 오래 있었던 거 같은데, 대체 어떤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정말 이곳에 갇혀있는 건 내가 아닌 당신이 아닐까. 그래서 말인데요. 당신,
나랑 같이 죽지 않을래요.


사진 : rachel a.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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