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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Mar 09. 2017

눈물이 마르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죽지 못한 것들이 다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내일을 미루고 있다.

눈물이 마르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기대앉은 벽의 서늘함도, 눈물과 콧물로 젖은 옷의 축축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텔레비전 소리는 물을 머금은 듯 웅얼대고, 힘없이 뻗은 두 손은 누군가 붙여 놓은 장식품처럼 내 것이라는 느낌이 없다. 삼십 년 가까이 살아온 몸이 새삼 어색하다. 한순간 이것과 내가 분리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닌 이것. 허물을 벗듯 몸을 두고 생각이 뒤로 밀려나는 기분이다. 언젠가 내가 아닌 이것이 내 목을 조르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초침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한 칸을 움직이는 사이에 지난 몇 칸의 시간을 구겨 넣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 초침을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내려가는 것조차 힘겨운 초침이 다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초침이 멈추면 분침과 시침도 멈추고 결국 시계는 죽겠지. 시계가 죽었다는 말은 누가 처음 했을까. 그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까. 움직이지 않는 것은 죽은 것이다. 움직임을 멈춰 죽는지 죽었기에 움직임을 멈추는지 모르겠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확실히 죽은 것이다. 죽은 시계는 며칠이고 같은 시각을 가리킨다. 흘러가는 시간에 상관없이 죽은 순간에 머문다. 어쩌면 죽음은 순간에 고정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건전지만 갈아 끼우면 시계는 다시 살아나겠지. 밀린 시간을 감아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살아 움직일 거다. 그렇게 지난 죽음은 손쉽게 잊히고 다시, 시계는 죽어가겠지.
잠들지 못하는 새벽. 지금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중 언제도 아니다. 죽지 못한 것들이 다시 살아갈 용기가 없어 내일을 미루고 있다.


사진: rachelakel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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