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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이 May 09. 2017

우산이 말했다.

놀란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산만 바라보았다.

우산이 말했다. 날고 싶어. 놀란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우산만 바라보았다.
재작년 봄 추위를 쫓는 비가 내렸던 날, 갑작스런 비에 난감해하던 여자에게 남자는 함께 쓰고 가자며 우산을 내밀었다. 전철역으로 가는 10분 남짓한 시간동안, 그리고 역에 도착해 차를 기다리면서도, 남자는 평소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두 사람은 서로 방향이 달랐고 여자가 타야하는 전철이 먼저 들어왔다. 인사를 나누고 여자는 차에 탔다. 문이 닫힐 때쯤 급하게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고, 닫히는 문틈 사이로 남자가 던진 우산이 날아왔다. 간신히 우산을 받은 여자가 닫힌 문 너머를 바라보자 남자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자는 그제야 남자의 오른쪽 어깨가 흠뻑 젖었다는 걸 알았다.
비가 그치고 봄은 빠르게 찾아왔다. 성급하게 다가왔지만 달가운 계절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여자는 늘 남자가 준 우산을 들고 다녔다. 우산을 쉽게 잊어버리던 여자였지만 남자가 준 우산만은 신기할 정도로 잊지 않았다.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평소에 쓰고 다녔다기엔 다소 귀엽고 작지 않나 싶은 우산이었고, 그덕에 여자는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번도 비를 맞지 않았다.
작년 겨울 눈이 녹아 비가 되어 내리던 날, 남자는 이별을 말했다. 여자는 그날도 남자가 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언제나 한 쪽 어깨가 흠뻑 젖으면서도 여자와 한 우산을 쓰던 남자는 그날따라 커다란 장우산을 들고 있었다. 조금도 귀엽지 않은 우산이었다.
3월이 가고, 여름과 가을이 다 지나도록 여자의 겨울은 가실 줄 몰랐다. 다시 겨울이 되었을 때, 여자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같은 계절을 겪게 되었음에 안도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났다.
그가 떠오를 만한 물건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우산만은 현관 앞 우산꽂이에 남아있었다. 습관처럼 우산을 꺼내들 때마다 여자는 놀랬다. 어째서 이 우산은 잊어버리지도 않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 놓고 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손에 끈이라도 묶인 듯 그럴 수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해가 길어지던 어느 날, 여자는 평소답지 않게 늦잠을 잤다. 서둘러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던 여자는 어제 본 뉴스가 생각났다. 오후부터 비가 내릴 거라 했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오래 내릴 비라며, 우산 꼭 챙겨나가라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캐스터가 말했다. 여자는 급히 손에 집히는 우산 하나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섰다. 역까지 정신없이 달려 겨우 차에 탄 뒤에야 여자는 가방 안에 든 우산을 보았다. 하필이면.
비는 서둘러 내리기 시작했다. 젖은 우산을 든 사람들이 전철에 하나 둘 타더니 여자가 차에서 내려 역을 나왔을 땐 적지 않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부터 내린다며, 많은 양은 아니라더니. 여자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펼쳤다.
5분 남짓 길을 걷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무심결에 본 건너편 버스 정류장에서 익숙한 얼굴이 스쳐갔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듯, 하지만 꼭 다시 봐야만 하는 것인 듯, 여자는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면서도 급하게 조금 전 그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게 사람들 틈에 섞인 그를 발견했다.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헤어진 그날 썼던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있었다.
여자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몇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며 여자의 시야를 가렸다.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남자는 없었다.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면 다시 한참을 아플 거라 생각했다. 생각하는 횟수는 줄었지만 그럼에도 이따금 한 번씩 떠오를 때면 몸이 저려오곤 했다. 아직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고, 여자는 조금 늦게 길을 건넜다.
하지만 뜻밖에도, 여자는 가볍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잘 지내고 있구나. 미움이나 그리움, 아픔보다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어쩜 그렇게 예전과 똑같은 모습인지, 참 여전하구나. 그 투박한 우산까지.
그늘에 오래도록 얼어붙어 있던 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눈을 이제야 발견한 건지도 몰랐다. 완전히 잊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너를 보고 웃을 수 있을 만큼은 괜찮아졌구나, 나도. 여자는 조금 전 우산을 펼치며 마음이 불편했던 자신이 거짓말 같았다. 네가 날 봤어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그 우산 들고 다니느냐며 놀라진 않았을까. 그럼 난 뭐라고 대답했을까. 그러게, 이 우산 참 지겹게도 안 잊어버리더라, 하면서 별 일 아닌 듯 말하진 않았을까. 별 일 아닌 듯. 그냥 그렇게.
그때였다.
날고 싶어.
바로 앞에서 얘기하듯 또렷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런 소리에 놀란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어디서 난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잘못 들었다 생각해 다시 발을 떼려는데, 다시금 소리가 들렸다.
날고 싶어.
바로 앞, 아니 위에서 들린 소리가 맞았다. 우산이었다. 우산이 그녀에게 말하고 있었다.
날고 싶어.
여자는 멀거니 우산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준, 그와 늘 함께 썼던 우산. 다른 건 모두 치워도 유일하게 남아있던, 신기할 정도로 잊어버릴 수 없던, 혹은 지겹도록 안 잊어버리던 바로 그 우산이었다.
문득 여자는, 그동안 자신이 어째서 이 우산만큼은 잊어버리지 않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참 오래도 붙잡고 있었구나.
조금 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다만 꽃을 깨우는 비라 생각하니 맞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여자는 손을 뻗어 올리며 우산을 잡은 손을 놓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우산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연등처럼, 수십 개의 풍선이 우산을 끌어올리듯 우산은 가볍게 하늘을 떠갔다. 그 모습을 보는 여자의 마음도, 함께 떠오른 듯 한껏 가벼워졌다.
그렇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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