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 Nov 04. 2021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여행

아무튼, 도서관

나는 여행을 많이 가 보진 않았다. 고등학교 때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오면서 또래 친구들에 비해 일찍 미국 여행을 하게 된 셈이었지만 그 이후엔 그럴듯한 배낭여행 조차 가보지 못했다. 한국에서 고 2가 끝나갈 때쯤 미국 시애틀로 이민을 왔고, 대학 준비 기간이 충분치 않아 미국 고등학교에 학년을 일 년 반을 낮춰 들어갔다. 고등학교만 4년 반을 다닌 셈이다. 뉴욕으로 대학을 가게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관광지인 곳에 살게 되면서 이곳으로 여행을 오는 지인들을 맞아 그들의 열정 덕분에 여러 곳을 둘러보며 재밌게 다니긴 했지만, 나에겐 바쁜 일상을 쪼개 비운 시간 동안, 삶의 터전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 들을 다닌 것이었기에 한 발 치 떨어져 ‘내가 살 곳은 아니니까’라는 생각과 함께 여행자가 가질 수 있는 특유의 가벼움 내지 여유는 가질 수 없었다. 여행 이라기 보단 외출의 느낌이 더 컸다고 할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주립대를 마다하고 등록금 비싸고 생활비도 많이 드는 뉴욕에 있는 대학에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데다, 대학 입학부터 대학원에 진입할 계획이 있었기에 평상시에도 늘 학점의 압박을 느꼈던 시기다. 성적과 직결되지 않지만 돈 드는 일들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엔 죄책감이 엄습했다. 그 자세는 대학원 입학 후에도 이어졌고 그러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다녔던 곳은 학교 도서관이었다. 두꺼운 교과서와 랩탑을 이고 진채.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가장 와보고 싶은 곳 또한 같았다. 꼭 와보리라, 공부 이외의 목적으로. 나도 저 옆에 보이는 사람들 같이 마음이 가는 대로 이 책 저 책 뽑아와 스르륵 책장을 넘겨보며 무슨 책을 살 것인가 혹은 무슨 책을 빌릴 것인가 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보리라. 책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막연히 그런 로망을 키워갔다.


대학원 공부를 마칠 때쯤 결혼을 했고, 바로 취직을 하고 얼마 안 되어 두 아이를 가진 워킹 맘이 되면서 여유 있게 서점에 가거나 도서관에 가는 일은 점점 더 뒤켠으로 밀려갔지만 언제나 나의

위시 리스트 일 순위였다. 그래설까. 감사하게도 아이들도 나만큼 책을 좋아한다. 동네 도서관에 함께 가면 이 책 저 책 골라보고, 어린이들을 위해 비치된 장난감이나 퍼즐들을 놀며 몇 시간도 거뜬히 보내다 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무료한 여름날, 갑자기 다른 동네 도서관을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동네 근처 도서관들은 이미 많이 가 보았던 터. 아이들에게 모르는 도서관으로 모험을 떠나자며 부추겼더니 모험이라는 단어에 들뜬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이미 검색하여 찾아본 곳이었지만, 운전해서 가는 낯선 길 내내 설레는 마음과 아이들이 실망할까 긴장된 마음이 뒤섞이니 고작 20분 남짓 되는 길이 마치 정말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도착한 낯선 건물 안엔 새로운 구조로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사랑하는 책들이 펼쳐져 있었고 간혹 익숙한 책이 눈에 띌 때면 낯선 곳에서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아이들도 나도 기뻐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공립 도서관 이어서인지 그곳에 와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이미 그곳이 익숙한 동네 사람들 같았기에 마치 관광객이 가득한 관광지 느낌이 싫어 현지 느낌이 가득한 곳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다 진짜에 도착한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낯설지만, 책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는 공간, 책을 좋아해야만 굳이 찾아오는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이 주는 특별한 연대감이 도서관의 적막함과 어우러져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을까. 몇 달 후 가게 된 보스턴 여행에도 자연스레 Boston Public Library를 찾아갔다. 오래된 건축 양식의 웅장함과 증축된 부분의 모던함이 주위의 책들과 어우러져 마치 역사의 중요한 한 부분을 목격하는 느낌이었다. 네 살 딸아이는 궁전에 들어온 거 같다며 신나 했고, 일곱 살 아들은 새로운 곳에서 느끼는 도서관 특유의 고요함이 기분 좋은 긴장감을 주었는지 보물 찾기를 떠난 마냥 들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들 뿐만 아니라 도서관 전체를 즐기는 좋은 경험을 하였다. 동네 도서관들 보다 훨씬 역사도 길고 규모도 컸기에 나름 관광지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그 후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보스턴 다녀왔어!”

“아, 정말? 좋았겠다. 어디 갔었어?”

“제일 먼저는 도서관을 가고…”

“응?”


왜지? 도대체 왜지?라는 표정부터 왠지 측은해하는 표정까지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도서관이 모두에게 특별한 곳은 아니구나, 더군다나 여행지까지 가서 들려 볼 그런 매력은 없나 보지? 그런데 좋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니지만, 나에겐 매우 특별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꿈꾸게 되었다. 도서관 투어. 그렇게 오랜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아도 금방 시작할 수 있는 여행. 익숙한 우리 동네만 벗어나도 펼쳐질 수 있는 여행. 새로운 책들과 자리를 지켜온 오랜 책들에 둘러싸여 미래와 과거 그 중간 어디쯤에 서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여행. 따뜻하고 사려 깊은 고요함에 휩싸인 곳에서 적당히 혼자일 수 있으나 외롭지 않은 여행을.


코로나 초기 lock down으로 모든 도서관이 문을 닫은 우울했던 시기, 아이들과 함께 인상 깊게 읽었던 작가의 다른 책들을 검색해 보다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을(‘The Wonderful Fluffy Little Squish’- Beatrice Alamagna) 발견했다. 평소 때 같았으면 도서관에서 빌렸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중고로 구입을 했다. 며칠을 걸려 도착한 책을 펼치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 안 쪽 표지엔 San Diego County Public Library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아마 도서관에서 처리되어 헌 책 방에 있던 걸 내가 산 모양이었다. 우연치곤 너무 운명적이지 않은가. 마치 그 도서관에서 나의 어설픈 도서관 여행 계획을 응원하며 언젠가 꼭 와보라며 보낸 초대장 같은 느낌이었달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시험을 잘 보지 않았더라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