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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Nov 04. 2021

베이컨과 햄의 차이

나의 사랑하는 여덟 살 아들의 까다로운 식성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가장 어려운 건 그 까다로움엔 일관성이 없다. 지난번에 잘 먹어서 또 해주면 그다음엔 안 먹는다. 별다른 이유도 없다. 아니, 너무 많다. 후각도 미각도 예민한지라, 조금 생선 냄새가 난다는 둥, 약간 매운맛이 난다는 둥, 저번이랑 치즈 맛이 다르다는 둥 (브랜드만 다른 같은 종류의 치즈였음에도), 여기가 약간 까맣다는 둥 (조금 탄 거 먹어도 안 죽어) 이런저런 이유를 될 때면 정말 내 아들이지만 얄밉다. 굶기면 먹는다지만, 밥 먹는 일로 혼나는 것만 아니면 너무 행복할 거 같다는 아이는 온종일 굶어도 별다른 배고픈 기색을 안 보이는지라 결국 내가 포기하고 만다. 아이가 크다 보니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어서 생판 굶긴다는 게 나의 의지로만 되는 일도 아니다. 먹을 것에 관심이 없는 나인지라 혼자였다면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끼니를 아이를 위해 힘껏 만드는데 아이가 까탈스럽게 굴면 정말 뱃속부터 충만하게 차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아이의 식습관은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식사 시간엔 긴장감이 감돈다. 여행 중이라 사 먹을 때면 신중하게 가장 먹을만한 것을 골라 아이에게 물어보고 먹겠다고 하면 시키는 식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위험 부담이 있지만, 다행히 사 먹는 음식의 맛들은 대부분 비슷한지라 아이가 무슨 맛이었는지 기억이 더 잘 나는지 먹겠다고 한 후 먹는 성공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얼마 전, 아이들이 여행지의 숙소를 너무 좋아해서 다시 찾게 된 여행을 떠났었다. 그래서인지 이른 체크 아웃 시간이 더욱더 아쉬웠던 아침이었다. 아침을 사 와서 숙소에서 먹고 나가기로 하고 내가 주문을 받았다. 아침으로 인한 실랑이로 마지막 기억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에 아들이 몇 번 먹은 적이 있던 프랜차이즈 카페의 아침 메뉴가 떠올라 그걸 먹겠냐고 물었다.

“너는 그럼 그 아침 샌드위치 먹을래? 전에 거기서 먹었던 거?”

“응! 그거 먹을래!”

그래도 여행이니 나와 남편 그리고 딸아이의 아침은 로컬 카페에서 픽업하고 아들 것만 프랜차이즈 카페에 다시 들려 따로 픽업했다. 숙소로 돌아와 모든 걸 펼치는 순간 아들의 외마디, “베이컨?”

아들은 베이컨을 45%만 먹는다. 베이컨의 빨간 살코기 부분만 뜯어먹고 핑크빛 비계 부분은 남긴다. 그래도 밖에서 요리된 베이컨은 곧잘 먹는 편이었는데, 왜? 베이컨 왜? 왜 또?

“네가 전에 먹었던 거잖아. 전에 잘 먹었던 거라고.”

“베이컨은 생각 안 나는데…”

“전에 했던 주문 기록에서 다시 골라서 산 거야. 똑같은 거라고. 그냥 먹어”

이미 말투는 삐끗하기 시작했고 속에선 어두운 생각들이 올라왔다. ‘일부러 가서 사 온 거라고. 전엔 잘 먹어 놓고 왜 또 그러니. 그냥 좀 먹어. 먹으라고. 조금 있으면 떠나야 하는데 빨리 그냥 먹고 웃으며 나가자고.’ 그러나 아이는 나의 마음을 아는지, 알아서 더 빗나간 건지, 반쯤 먹고는 못 먹겠다고 선포했다. 먹겠다고 한 식사를 다 안 마칠 경우 그날은 텔레비전을 안 보는 것이 예전부터 있는 아이와의 약속이다. 그래서 이미 그건 포기한 듯한 눈치였다. 해피 엔딩으로 끝내고 싶었던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거 같고, 왜 그냥 협조해 줄 수 없는지 애석함에 나의 마음은 강퍅해졌다. 결국 먹겠다고 하고 안 먹었으니 그 샌드위치는 너 돈으로 산 거로 치라고 말하기까지 이르렀다. 사고 싶은 게 있다며 용돈을 모으고 있던 아이는 공정치 않다며 소리 질러 댔고 여행의 훈훈한 마무리는 날아갔다. 나라고 마음이 좋을 리 없었다. 좀 더 지혜롭게 타일렀다면 아이도 먹을 만큼 먹고 웃으며 여행을 마무리했을 걸 내가 망쳤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문 내력이 나와 있는 카페 앱을 다시 켜 보던 중 깨달았다. 아이가 전에 먹었던 샌드위치엔 정말 베이컨이 없었구나! 베이컨이 아니라 햄이었다. 계란, 치즈는 똑같이 들어가지만 하나는 베이컨, 다른 하나는 햄인 두 종류가 있었는데 베이컨이 들어간 걸 내가 며칠 전에 시켜 먹고는 까맣게 잊은 채 그걸 아이가 먹었던 메뉴라고 착각한 거였다. 헉. 어떡하지. 이미 지난 일인데 뭐, 이 순간 꼭 그걸 밝혀봤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다고 그냥 있어? 아이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운 채? 뒷좌석에서 풀이 죽은 채 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보자니 덮을 순 없었다. ‘아하하’ 갑자기 멋쩍은 웃음소리를 낸 뒤 자백했다. 나의 실수였다고. 너는 베이컨이 들은 걸 먹은 적이 없었다고. 엄마가 미안하다고.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던 아이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거 봐, 내가 맞았지! 괜찮아’라고 말하더니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렇게 쉽게 나를 용서했다. 이럴 때 보면 아이의 마음은 나보다 넓다. 아이는 밥그릇이 작은 대신 마음 그릇이 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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