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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Nov 04. 2021

길게 머무는 햇살에 담긴 위로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땀이 잘 나는 편인데 아무리 덥다고 다 벗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에어컨 바람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는 발가락 사이에 끼어있는 모래처럼 귀에 거슬리고, 만성 비염이 있는 탓에 먼지가 많은 에어컨이라도 켜지면 재채기와 콧물 폭탄을 맞는다.


그런 내가 여름을 기다리게 된 것은 엄마가 되고부터다. 어느덧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나는 여름을 설레는 마음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할 수 있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하나만 꼽자면, 길어진 해이다. 창문이 많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나는 퇴근 시간 회사 밖을 나설 때야 밖이 밝은지 어두운지 확연히 알게 되는데, 보통 일정한 시간에 퇴근하는지라 계절의 오고 감을 그만큼 정확하게 몸소 체험하는 순간도 없는 거 같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 다가올수록 문을 나설 때면 어스름함이 깊어지다 결국 깜깜한 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땐 회사에서 하루를 다 보낸 기분이 들면서 아이들을 만나러 집에 가는 길 마음이 초조해지고 다소 울적해진다. 반대로 해가 길어지는 계절 여름이 다가오고 밖을 나설 때 아직도 환한 햇살이 비추면 마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면서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을 번 느낌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직장인들 사이라면 퇴근 후 집에 가면 두 번째 직장 육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농담아닌 농담을 한 번쯤은 주고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퇴근 후 육아가 고되긴 하지만 여름의 길어진 햇살은 나를 용감하게 만든다. 집에 도착해 저녁을 먹었는데도 밝은 하늘을 보면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을 나설 용기가 난다. 더운 날씨에 아이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진 만큼 발걸음도 가볍다. 온종일 못 보았던 아이들을 힘껏 안아 볼을 부대끼고 놔주면 깔깔거리며 뛰어간다. 저녁 바람에 흔들리는 무성한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이제 막 시작된 노을빛에 반사되어 비취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저 저렇게 건강하게 뛰어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없이 감사해지고 너그러워진다.


길어진 여름 저녁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바로 퇴근 무렵 아이들의 깜짝 방문이다. 남편이 모처럼 시간이 되는 날이면 나의 퇴근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때쯤 “우리가 가고 있어요.”라는 문자와 함께 뒷좌석에 앉아있는 두 아이의 사진이 날라오면 중요한 데이트 약속을 앞둔 사람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업무를 마무리하는 손이 빨라진다. 사진 속 부산스러웠을 준비의 흔적이 고대로 담긴 아이들의 옷차림과 상기되어 있는 작은 얼굴들을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회사 근처에서 바쁘게 오가는 타인들에 둘러싸여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가족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참 색다르다. 낯설면서 친근하고, 매일 나와 살을 부대끼며 살고 있지만 벅차오른다.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강가 공원으로 향한다. 더위도 한숨 쉬어가는 강바람을 맞으며 잡기 놀이도 하고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한다.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두 볼 가득 햇빛을 잔뜩 머금고 아이스크림 수염을 하고 입을 벌린 채 잠들어있는 아이들을 보면 여름은 나에게 오늘 하루도 잘 보내었노라고 말해 주는 거 같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괜찮다고, 꼭 둘 중의 하나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스스로를 매번 다독이고 다잡아도 어쩔 수 없는 아쉬움에서 온전히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여름의 길어진 저녁은 그런 나에게 두 마리의 토끼를 잡고 있는 듯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물론 여름의 저녁이 매일 이렇게 아름답고 눈부시게 지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햇살 가득한 저녁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다음 해 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설레지 않을 수 없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잘 할 수 있다고, 잘 지내고 있노라며 뜨겁게 다가와 길게 머무는 여름 저녁의 배려심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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