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롯 Nov 04. 2021

언젠가

‘취미: 독서’라고 답하면 정말 딱히 취미가 없을 때나 으레 적어놓는 고리타분한 답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취미가 독서였다. 중학교 때 특별 활동 시간이 따로 있어 반을 골라야 할 때도 난 독서 반을 골랐다. 물론 독서 반에 정말 책을 읽으러 온 아이들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난 그 시간 동안 ‘대지’도 읽고 ‘김약국의 딸들’ 도 있고 ‘토지’도 읽었더란다. 물로 다 아빠가 사다 놓으신 책들이었지만, 가끔 선생님께서 지나가시며 무슨 책들을 가져왔는지 보실 때가 있었는데, ‘너 이런 책도 읽을 줄 알아?’ 하실 때면 왠지 교양인이 된 거 같아 우쭐거리던 철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했었지만, 그 시절 나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지’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토를 달아볼 생각조차 못 했던 수동적인 학생이었던지라 나도 모르게 독서는 ‘여가’ 생활, 즉 여분의 시간이 날 때만 할 수 있는 활동으로 여기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 입시로, 대학생 때는 대학원 준비로 마음이 쪼들리던 나에게 좋아하는 책을 읽는 시간은 사치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얼마나 책을 좋아했었는지도 잊어가던 시점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대형 서점에 들어섰지만, 목적은 책을 고르기 위함이 아닌 내부에 있는 카페에서 공부할 목적이었다. 그날따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오는 어린이 책 섹션에 비치된 한 책이 나를 멈춰 서게 했다. ‘Someday’라는 제목의 표지였는데, 무의식적으로 ‘언젠가는 이 지겨운 공부에서 벗어나게 될까’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하늘 높이 아이를 안아 올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담백하게 묘사된 그림도 함께였다. 엄마가 커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자신의 바람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내용과 잔잔한 삽화가 담겨있는 책이었다. 한 장에 고작 한 문장 담길까 말까 한 그 짧은 책을 다 읽고 나니 한 편의 시를 읽은 듯한 여운과 인생에 대한 대서사를 읽은 듯한 깊은 감동이 동시에 느껴지며 눈가엔 눈물이 맺히고 마음이 따뜻하게 먹먹해졌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결혼도 하기 전이었던 그 시절 난 그 책을 구매했다. ‘나중에 혹시라도 딸을 낳는다면 꼭 읽어줘야지’라는 야무진 포부도 가졌던 거 같다.


그렇게 다시 깨달았다. 책 한 권이 줄 수 있는 힘에 대하여. 어린이 책으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연령과 관계없이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그 무한한 힘과 깊이에 대하여. 그렇게 난 다시 책과 친해질 수 있었다. 시간은 여전히 없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론 서점에 있는 카페에 공부하러 갈 때마다 으레 어린이 책 섹션을 서성이며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읽어보곤 했다. 다시 시작된 독서는 나에게 더는 한가한 시간에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시간을 내서 조금이라도 해야만 나의 숨을 트게 해 주는 생명줄 같은 존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10년 남짓이 지난 지금 나는 정말 딸을 가진 엄마가 되었고 옛날에 사놓았던 ‘Someday’ 그 책을 가져다 함께 읽었다. 아직 어린 아이는 얼마만큼 내용을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는 해죽 웃으며 나를 안아주는 걸 보니 가장 중요한 걸 이해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 아이를 보며 바래본다. 언젠가 너도 이렇게 힘을 줄 수 있는 책을 찾게 되길. 너와 함께 책을 읽었던 엄마의 마음은 엄마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너와 나누고 싶었던 간절한 사랑이었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길.

작가의 이전글 길게 머무는 햇살에 담긴 위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