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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Nov 12. 2021

사랑의 롯데월드

오랜만에 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다녀왔었다. 남편은 일정상 잠시만 다녀가고 나만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더 길게 머물렀다. 아이들이 아기일 때 다녀간 뒤 처음이라 이번 방문이야말로 정말 제대로 된 방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미국에 아이들을 보러 자주 다녀가시긴 했지만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한국에서 한 달 이상 있어본 지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정말 색다른 경험이었다. 우리 집에 와 계실 땐 가슴 한편 버릴 수 없던 책임감이 있었다. 그때도 부모님이 많은 일을 도와주셨고, 특히 엄마는 부엌살림을 도맡아 주셨기 때문에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신경 안 쓰고 지나가는 날들이 많았지만, 뭐랄까 그래도 내가 머무는 나라에, 나의 집에 오셨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집에 와 계시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나의 책임이 없지 않다는 부담감이 생겨 머무시는 동안 부모님의 암묵적인 기분과 행동거지들을 나도 모르게 주시하곤 했었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행여나 불편해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살피고 배려하시느라 마냥 편하시지만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한국 부모님 집에 내가 아이들과 머물렀을 땐 느낌이 달랐다. 부모님의 ‘나와바리’에 내가 들어간 느낌이랄까. 부모님은 우리를 챙기시는 모습이 훨씬 편안해 보이셨고, 나도 철없는 딸의 모습으로 돌아가 주시는 사랑을 그냥 담뿍 담뿍 받으며 정말 쉴 수 있었다.


그런 꿈같은 시간을 보내던 끝 무렵,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 왔으니 ‘꿈의 나라 신비의 세계 롯데월드’에 안 갈 수 없었다. 원래는 야심 차게 부모님과 언니 다 함께 입장할 계획을 가지고 아빠 차로 출발했지만, 가는 도중 입장료 가격을 알게 된 엄마는 놀이 기구를 타지도 않을 텐데 입장료가 너무 비싸다며 우리를 태워다 주고 들어가진 않으시겠다고 했다. 놀이기구를 사실 별로 안 좋아하시는 아빠도 그럼 엄마와 함께 안 들어가시겠다고 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계시겠다는 엄마에게 언니는 그럼 자기가 끝나고 나와 아이들을 버스 태워 보낼 테니 집에 가셔서 기다리시라고 했다. 광역 버스 타면 갈아탈 필요 없이 한 번에 부모님 집 앞에서 내리니 어려울 거 없다고. 하긴 몇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시간을 어린이들과 젊은이들 위주로 꾸며진 공간에 부모님을 계시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밖에서 기다리시라고 하는 것도 아닌 거 같아 잘 찾아갈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시라고 했다.


거의 30년 만에 처음 온 거 같다는 언니도, 나도 아이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오니 밖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시라며 엄마 아빠 등을 떠밀었던 언니도 막상 나를 아이들과 함께 보내려니 걱정이 되었는지 버스 운행 경로를 나에게 보여주며 당부했다.


“그러니까 000역까지는 버스가 안 서고 쭉 갈 거야. 000역을 지나면서는 사람들이 많이 내리기 시작할 텐데 너는 xxx역을 지나자마자 바로 벨을 눌러야 해. 그 두 정거장 사이가 짧으니까 바로 벨을 누르라고. 알았지?”

“아유, 알았어. 걱정 말라니깐”


나도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10년이 넘게 한국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적이 없었던 터였고, 별 것 아닌 것에 쑥스러움을 잘 느끼는 나는 버스 벨 누르기도 그중 하나였기에 조금씩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줄까지 같이 서주고 버스에 올라타는 거까지 보고서야 돌아서는 언니를 뒤로 한 채 버스는 출발했다. 출발하기 직전 아이들의 자리를 바꿔주느라 잠시 엉거주춤 일어났는데 기사 아저씨는 버스에서 일어나며 안된다며 큰 소리로 핀잔을 주셨다. 안 그래도 주눅이 들어있는데 아저씨께 한 소리를 듣자 더 긴장이 되었지만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애써 의연한 척했다.

언니는 그 새 가족 카톡방에 내가 몇 시에 무슨 역에서 출발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신나게 논 아이들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난 안내판에 뜨는 정거장 이름들을 암기라도 할 듯 주시했다. 언니가 말했던 000역이 지나자 정말 빠르게 여러 정거장 이름들이 지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들어 고개가 이리저리 휘청였고 어떻게 서든 좀 받쳐주고 싶어 움치럭거리면 기사 아저씨는 일어서면 안 된다고 소리쳤다. 이윽고 벨을 눌러야 하는 타이밍이 왔다. 억울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벨을 누르고 먼저 큰 아이를 깨워 내보내고 잠든 작은 아이를 안아 올려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데 아저씨는 잠깐 기다리라고 나를 향해 또 소리쳤다. 입구를 보니 누군가 타려는 거 같았는데 아저씨께 무슨 질문을 했는지 아저씨는 무언가를 되묻는 거 같았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쭉 빼서 입구를 보는 순간 밖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아니에요. 여기 왔어요. 얼른 내려!”


엄마와 아빠였다. 결국 내가 제대로 내리지 못하고 지나갈까 봐 집 앞 정거장에 나와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아직 잠이 덜 깬 큰 아이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가는 아빠의 뒷모습과 곤히 잠이 든 둘째를 업고 걸어가는 엄마의 굽은 등을 보며 생각했다. 아빠는 그 기사 아저씨께 뭐라고 묻던 중이셨을까. 마흔이 다 돼가는 딸이 어린 두 손자 손녀를 데리고 제대로 집을 찾아오지 못할까 걱정하셨을 엄마와 아빠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오는 내내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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