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차를 샀다. 그전까지 쓰고 있던 차는 타는
내내 큰 고장도 잔 고장도 없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엔진의 수명이 다해버렸다. 남편은 그동안 큰돈 들어가는
일 없이 잘 탄 거라고 했지만, 목 돈이 들어갈 생각에 이미 마음이 꽁 해져 차를 사는 과정 내내 토라져있었다. 그런 나 대신 남편은 새 차를 고르고, 가격을 알아보고, 협상하고, 계약까지 혼자서 다 마치고 돌아왔다. 다음 날 함께 돈을 지불하고 차를 찾아오던 길에 마음이 그렇게
허할 수가 없었다. 계속 새 차의 장점들을 말해주면서 자기 차보다도 더 좋은 거 같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그런 내 기분을 달래주려고 하는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엔 그런 건 하나도 상관없다는 듯 창 밖을 내다보며 ”몇 년 동안 모은 돈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사라지다니…“라고 말해버렸다. ”사라진 건 아니지. 차가 생겼잖아…“라고 말하는 남편의 한 풀 꺾인 목소리에 그제야 조금 미안해졌다.
눈 깜박할 새 증발해 버린 거 같은 통장의 액수보다 더 막막했던 건 이렇게 돈 드는 일은 계속 일어날 테고 그때마다 난 원점으로 돌아가길 반복하며, 재정적으로 더 나아질 거 같지 않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초봉은 다른 직업보다 높은 편이었지만, 공공의료 기관 특성상 꼬박꼬박 연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남편 또한 그런 걸 당연하게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직장을 옮기거나 일자리를 하나 더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 진작 했어야 했나 싶었다.
그런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하던 무렵, 클리닉에 15살 남자아이가 환자로 왔다. 영어를 거의 하지 못 하고 스페니쉬가 모국어인 아이였다. 입을 열었는데 치석이 이 전체를 덮고 있어 이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고 한쪽 아래 어금니는 많이 썩어 잇몸 밑에까지 부어 있었다. 스케일링을 시작했다. 안 쪽에 이가 보일 때까지 치석을 떼어내는데 광산에서 보석 캐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30분을 훌쩍 넘기며 클리닝이 계속되었지만 끝나려면 아직 멀어 보였고 점점 손도 아프기 시작했다. 어차피 필요한 모든 치료들이 내 선에서 끝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리퍼할 거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다 해 주진 못 한다 해도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다른 의사를 만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간단할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꼭 쥐고 있는 아이의 두 주먹이 보였다. 안 아플 리 없었다. 꼭 필요하다는 걸 아는지 있는 힘 껏 참아보는 중인 거 같았다. 아이에게 숨을 길게 내쉬라고 말해주며 나도 함께 숨을 다 잡고 클리닝을 마쳤다. 다른 나라에서 왔다는
아이에게 긴 시간 동안 이를 제대로 닦을 수 없던 때가 있었는지 물었다.(가끔씩 shelter에 머무르고 있는 아이들도 있다.) 아이는 그렇다고 했고 엄마 없이 아빠와 살았던 때라고 했다. 지금은 누구와 사냐고 물으니 삼촌과 같이 산다고 했다. 뭐지? 아이가 방치되고 있는 걸까? 남은 치료들에 대해 설명해 주고 약을 처방해 주기 위해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경우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하는지 되려 방어적으로 화부터 내는 부모들을 겪어봤기에 조금은 긴장한 채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통역을 통해 연락이 된 아이의 삼촌은 그렇지 않았고, 나의 설명을 하나하나 자세히 듣고는 알겠다며 고맙다고 했다. 아이 또한 고맙다고 했다. You’re welcome이라고 대답하였지만 속으론 나 역시 아이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꼭 필요한 시기에, 너무 혼란스럽던 와중에 와 주어서 고맙다고,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 다시 상기시켜 주어 고맙다고. 난 또다시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할 테지만, 그리고 매우 높은 확률로 부자가 될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의미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