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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Mar 18. 2022

휴식

타주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남편이 참석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일 동안 혼자 육아를 하게 되었다. 그 일정 중 하루는 방과 후 돌봄이 없는 오전 수업만 있는 날이었기에 아이들을 픽업하기 위해서 그날은 휴가를 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휴가였지만, 막상 내고 보니 아이들이 학교 가 있는 동안 홀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세 시간 정도 주어진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는 설레기 시작했다. 보통 휴가를 내는 경우는 어떤 이유든 아이들, 혹은 가족들과 함께인 경우가 많았지 이렇게 오롯이 혼자인 경우는 정말 흔치 않았기에 설렐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드랍해준 뒤 무엇을 하면 좋을지, 그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채울 수 있을지 매우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하고 싶은 것이 어마어마하게 많진 않았다… 기 보단 세 시간은 무언가를 여유 있게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란 걸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이 전에도 흔치 않은 기회라며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여러 가지를 계획했다 결국 시간에 쫓겨 움직이느라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땐 오히려 아쉬운 마음과 지쳐버린 몸만 남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는 가기 힘들었던 근사한 브런치 집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할까, 미루고만 있던 아이키아에 가서 반품하는 일을 마친 뒤 재고를 기다리던 수납장을 사 올까, 그냥 집으로 돌아와 늘어져 누워 있다 여유롭게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을까.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는 곳에서 (혹은 인제 일어나서 누군가를 챙겨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늘어지게  보는 것은 아직도 나의 버켓 리스트 1위이지만, 어차피 일어나서 아이들의 아침을 챙기고 학교에 태워다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후 집에 돌아와 봤자 늘어져서 여유 있게 책을 읽기는커녕 눈에 밟히는 집안일들을 시작할  뻔했다. 나가야 한다, 집으로부터. 혼자 먹는다는  어려워 하진 않지만 워낙 맛집을 챙겨가는 스타일도 아니니 레스토랑에서 먹는 여유 있는 브런치보다는 간단하지만 맛있는 아침을 챙겨 먹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책을 가지고 나가 카페에서 아침을 먹고 책을 읽을까. 아이키아 반품도 해야 하는데. 이러다 정말 반품기간이 지나버리는  아냐. 수납장 재고도 한참 기다렸는데 반품과 동시에  돈으로 수납장  오는 것도 꽤나 효율적이고 기분 좋을 일처럼 생각됐다. 지금이 아니면  이걸 언제 하겠어. 나중에 아이들이랑 가면 한참 걸릴 거야. 사사샥 바꾸고 나면  읽을 시간도 남을지 몰라. 그래, 아이키아에 가자.


아이들을 내려주면서도 엄마는 이제 아이키아에 갈 거야라고 말할 만큼, 정말이지 아이키아에 갈 생각이었다. 효율적인 동선을 생각하며 아이키아에 향하려던 중 저 언저리에 있던 생각이 스쳤다. 도서관. 도서관이 있었지. 언젠가 꼭 아이들 없이 혼자 와서, 어린이 섹션이 아닌 어른 섹션에서, 책 한 권 한 권 훑어보며 찬찬히 읽고 싶은 책들을 골라봐야지 생각했었잖아. 또 바쁘게 달음질치려던 내 마음을 황급히 붙잡으며 너무나 고맙게도 그 순간 그 생각이 떠 오른 거다.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설레는 마음에 심장도 빨리 뛰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평온한 고요함에 압도되었다. 이따금 들리는 낮은 톤의 두런두런 소리가, 새 책과 오래된 책들이 어우러진 냄새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지만 각기 다른 모양새의 책들이 조용하면서도 소란스럽게 나의 감각들을 자극해오자 온 몸이 외치는 거 같았다. 완벽한 선택을 했다고. 정말이지 이곳에 오길 잘한 거라고. 진열장에 놓인 책들의 제목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뽑아서 책장을 넘겨가며 목차를 살피고, 작가 소개와 서문을 읽어보며 책들을 골랐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을 빼곡 채웠고, 이 선택에 대해 한 톨의 후회도 남기지 않으며 돌아갈 수 있었다.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나는 그날  시간 동안 정말이지 너무 좋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움직이지만, 서로에 대한 존중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에서, 글을 마주하며 나는 진정 자유롭고 행복할  있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차려놓고 나간 순하고 정갈한 밥상을 마주한 거처럼 몸과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아이들을 픽업한 오후엔, 서점에 갔다. 아이들이 책을 고르는 동안, 나도 같이 둘러보다가  아이를 위해 처음으로 사주었던 동화책 ‘A Sick Day for Amos McGee’ (Philip C. Stead/Erin E. Stead) 이어 정말 오랜만에 나온 신간 ‘Amos McGee Misses the Bus’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인터넷 서점으로 가격을 비교하려다 멈췄다.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아이들이 고른 책들과 함께 카운터로 가져가 계산했다. 물론 내가 지불한 책들의 값은 도서관에서 누리는 것들에 비하면 턱도 없이 모자랐지만(  발치  나아가자면 독립 서점에서 구매하는 것이  좋았겠지만) 우리 모두의 읽고 쓰는 마음들을 향한 작은 응원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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