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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Jan 15. 2022

가장 멋진 고백

아무튼, 커피

처음 시작은 엄마가 손님들에게 대접하던 믹스 커피였다. 우유가 아닌 프림을 타는 것이 보편적이던 그 시절, 엄마가 만든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셋의 그 커피가 얼마나 맛있던지 옆에 착 달라붙어 ‘한 모금만’ 외치며 홀짝홀짝 훔쳐 먹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난다. 블랙커피를 즐기던 아빠의 커피도 한 모금 훔쳐먹고 깜짝 놀랐던 것도. 어린 마음에 ‘우리 아빠는 독한 사람인가 봐. 사약 맛을 본다면 이런 맛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것도.


엄마한테서 훔쳐먹던 도둑 커피와 커피맛 아이스크림 더위 사냥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고등학생 땐 독서실 자판기에서 빼먹던 캔커피가 있었다. 졸린 기운이 천근만근 눈꺼풀을 짓누를 때면 인사불성이 되어 독서실 입구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고 500원 동전을 넣어 캔커피를 뽑아 마셨다. 사실 그땐 커피 그 자체로 나의 졸음을 쫓는 데는 미미한 역할을 한 거 같다. 졸음에 대항해 혼신을 힘을 다해 싸우다 잠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발 끝에서부터 끌어모아 동지(커피)를 얻기 위해 뛰쳐나갔을 때, 방 문 밖을 나서자마자 이것은 나 혼자만의 전쟁이 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밀려오는 무안 감(특히 독서실 입구를 지키던 분의 놀라서 쳐다보는 눈과 동공이 반쯤 풀린 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먼저 나를 깨우고, 커피를 다 마신 후엔 카페인의 이뇨작용으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 순간들이 나를 깨웠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 그래도 좋았다. 그 삭막하고 지루했던 독서실 안에서 아기자기한 추억거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달칵하고 떨어지던 그 캔커피 덕분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면서는 독하게 공부해야 하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그땐 커피에 우유만 타서 먹게 되었다. 커피를 가르며 내려앉는 우유처럼 쌉싸름하며 묵직한 맛이 나의 하기 싫어하는 마음을 지그시 눌러주길  바라면서. 우리는 피 뽑으면 피가 아니라 커피가 나올 거라는 둥 공부하는 친구들과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리는 것이 그나마 낙이었던 불안하고 막막하던 시절, 커피는 나에게 손에 잡히는 따뜻한 위로이자, 앉은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낭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나를 깨어있게까지 해 준다니 감사할 정도였다.


핸드크래프트 커피는 블랙커피보다 훨씬  비쌌기 때문에 평소 공부할  매일같이, 하루에도 두어    마시기엔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로 용돈이나 겨우 벌던 대학생이었을 , 지인들과 어울려 함께 카페에  적이 있다. 진짜 마시고 싶은   메뉴 하단에 있는 카페 모카였지만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제일  줄의 오늘의 커피를 시켜야 했기에 갈팡질팡 하다 옆을 보니 건축회사에 다닌다는 어엿한 ‘직장인오빠도 메뉴판을 훑어보며  있는 중이었다. 순간  생각을 눈치챘는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직장이 생기면 아무 커피나 마시고 싶은    골라서  먹을  있게   같잖아? 나도 그럴  알았는데막상  벌게 돼도 여전히 가격을 신경 쓰게 되더라…” 씁쓸하게 웃는  오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충격에 빠졌다. 이다음에 커서 (그때도 충분히 컸었건만) 돈을 벌게 되면, 고정적인 수입을 갖게 되는 그날엔 ‘커피 정도 그냥 먹고 싶은 걸로 아무렇지 않게  마실  있는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처음으로 풀타임으로 일하며 월급이란 걸  받게 되었을 때 어느새 나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커피를 막상 안 사마시 지도 않으면서 매 번 같은 고민에 휩싸였다. 아까 마셨는데 또 마셔도 될까, 지금 비싸지만 먹고 싶은 거 한 번 마시고 그냥 오늘은 내내 안 마실까 아님 그 한 잔 값으로 싼 커피를 두 번 마실까, 지금 딱 마시고 싶은데 세 시까지 기다렸다 스페셜 세일할 때 마실까, 커피 한 잔에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정상인가. 행여나 생각보다 커피를 많이 사 마시게 된 날에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날도 여전히 카페 안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H 연애 중이던 시절, 메뉴판을 보며 주춤하는 나의 눈빛을 보고 H  마음을 읽은  말했다.


‘마시고 싶으면 또 마셔요. 마시고 싶은 걸로. 내가 앞으로 커피는 맘 놓고 마시며 살 수 있게 해 줄게요’


머리를 느낌표로   맞은  같은 느낌이 들더니 감동이 밀려왔다. 막상  누구도 나에게 절대  된다고 금한 이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가장 눈치를 주던 건 나 스스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게 참 소중하고 특별한 것에 대해 ‘마음껏 좋아해도 괜찮아, 난 이해할 수 있어’라고 말해  느낌이었달까. 돈으로   없는 여유로운 마음을 선물 받은 듯한 느낌도 함께. H  이후 결혼한 것은 물론이고, 어떤 고백 보다도 어떤 위로보다도 그때 들은  말이 여태까지 가장 멋진 고백으로, 강력한 위로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에겐 아직도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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