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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Apr 20. 2022

콜센터로 간 치과의사_1

"Can you give me a call?"

디렉터에게서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해도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그저 몇 시간 전에 내가 오늘 보내 준 수술 장갑 박스들의 만료일이 지난 거 같다고 보냈던 이메일에 대한 답이라고만 생각했다. 사실 환자를 보는 중에도 몇 번이나 부재중 통화가 있었던 터라 이렇게까지 유난 떨 일은 아닌 거 같은데 싶으면서도 평소 편집증 성향을 가진 디렉터였기에 그러려니 생각했다. 대수롭지 않게, 'can you calm down'이라는 뉘앙스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려온 말은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


내용인즉슨, 오미크론이 너무 번지고 있어 병원이 다시 마비되려는 조짐이 보여 병원에서 도움을 요청해왔고, 무엇보다도 병원의 Occupational Health Services (OHS) Call Center에 전화가 빗발쳐 마비상태인데 결국 그곳이 마비되면서 오미크론으로 인해 격리됐던 직원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다는 clearance를 받는 과정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병원에선 일손이 달리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그 콜센터로 deployed 될 사람들이 필요하고, 우리 프로그램에 속한 의료진들은 오미크론으로 바빠 치과 의사들을 보내기로 결정했으니 내일부터 그곳으로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사실 deployment는 지난 2년간 두 번에 걸쳐 있어 왔던 일이고, 큰 병원의 작은 프로그램에 속해 있는 나로서는 이렇다 할 결정권 없이 따르는 수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지난번엔 코로나 테스팅 센터와 콜센터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전혀 선택권도 없이 콜센터라니... 내가 경악했던 큰 이유는 난 정말이지 전화 통화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지난번엔 대부분의 동료 의사들이 테스팅 센터를 기피하며 콜센터를 선택한 반면 나는 테스팅 센터를 택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치과의사들이 콜센터에 간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이번엔 전원이 그곳으로 deploy 되는 것이었다. 디렉터는 한 달 정도면 될 거라고 하였지만 믿기 힘들었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계속 미뤄지면서 반년을 훌쩍 넘게 테스팅 센터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일터로 돌아온 후엔 리셋된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었기에 상실감은 더 심했다. 당황했고, 억울했고, 싫었다. 왜 하필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냐고 따지듯 물었지만 그가 진짜 이유를 나에게 말해주지 않을 것도, 그 역시 누구를 보내고 안 보내는 것을 결정할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이유를 알게 된다 한들 나의 납득과는 상관없이 퇴사하지 않을 바엔 결국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화는 진행될수록 힘이 빠졌다. 나는 항의를 하기보단 주로 따르는 편이었기에 조금 놀란 듯한 그는 대화의 마지막쯤 나에게 물었다.

"What worries you most?"

일렁이던 마음에 누군가 찬 물을 끼얹은 느낌이었다. 그에게 '난 정말 전화하는 걸 싫어해'라는 이유를 될 순 없었다. 난 이렇게 갑작스럽게 다른 곳에 출근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것에 맞혀 근무 시간을 바꾸기 힘들다는 점, 그곳이 나의 분야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인데도 가야 한다는 점, 파견 기간조차 불분명하다는 점 등의 이유를 주섬주섬 말했다. 나의 말투는 이미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 같았고, 그 역시 이해한다며, 정말이지 이번엔 길지 않을 것 같다고, 근무시간은 최대한 바뀌지 않는 쪽으로 미리 얘기해 놓겠다고 달래는 듯 말했지만, 전혀 달래지지 않는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그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나는 정말 왜 그렇게 동요됐을까. 전화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왜 그렇게 전화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연락을 해야 하는 경우 문자나 이메일을 선호하고,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경우에도,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전에 준비운동을 하듯 심호흡을 한번 해야 한다. 물론 나는 문자와 이메일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던 시절에도 이미 성인이었을 만큼의 세월을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전화에 대한 나의 반감은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면서 유별나 졌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기에 읽고 쓰기에 까막눈은 아니었지만, 말하고 듣는 것은 한참 모자랐다. 그런 상태에서 영어로 전화통화를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말을 잘 못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해도 얼굴을 마주한 상태에선 눈빛으로, 표정으로, 손짓으로 부족한 정보를 메꿀 수 있었지만, 통화로는 불가능했다. 난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상대방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트라우마 수준으로 이어져서, 원활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된 후에도 전화로 이야기해야 할 때면 특히 버벅거렸고,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말하는 내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정신과 의사의 오피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간혹 전화를 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정말 식은땀이 났다. 여러 악센트가 섞여있는 다양한 환자들과 통화해야 할 경우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행여 그런 경험을 한 환자가 나중에 선생님과 상담 도중 나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지 않을까 걱정하곤 했다. 원래 다른 사람과 수다를 떠는 것으로 마음이 풀리는 성향도 아니어서 시시콜콜 전화로 누군가와 얘기를 많이 하는 편도 아니기에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일은 자연스레 나의 삶에서 배척되었다. 물론 지금도 나의 환자들과 혹은 보호자들과 전화해야 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런 경운 내가 가진 전문적인 지식이나 소견을 전달하는 입장인 경우가 많기에, 물론 긴장되지만 나는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진 채 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콜센터에서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닌 일에 관하여 전화로 (전화로만!) 업무를 봐야 한다는 생각은,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본인의 일을 하느라 바빴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한들 나의 통화 내용을 주시하고 있을 만큼 나에게 큰 관심을 보일 리 없었을 텐데 부풀어 오른 자의식은 모든 상황을 극적으로 여기게 한 거 같다.


그렇게 이어진 생각은 결국 아닌 척하고 싶던 더 큰 이유, 마음속 구석 깊이 밀어 넣었던 열등감과 그 양날의 검, 교만함에 닿았다.  거봐, 결국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별로 중요할 거 없어. 그러니까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있는 거야. 소위 '치과의사'라 한들 무슨 소용이니. 성공하지 못했으니까, 그만 둘 힘이 없다는 거 아니까, 혹 그만둔다 한들 별로 상관없으니까 나를 막 대하는 거야. 이번엔 콜센터로 보내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아아,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여기서 어디까지가 정말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망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난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스스로를 비참함에 밀어 넣었고, 진짜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콜센터에서 일한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경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라면 이 정도는...'이라는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시선을 불편해하면서도, 나 역시 '(치과) 의사인데 내가 왜...'라는 못난 허영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비참하고 창피했다.


그렇게 바닥을 치며 나의 불편함을 직시하고 나자, 감사하게도 그다음은 생각이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콜센터로 가게 된 치과의사라니.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고 할 순 없겠지만 흔치는 않은 일일 듯했다. 모두에게 공공연히 알릴 만큼의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써보는 것은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나의 이 못나고 지난한 싸움을 글로 풀어내며 다음번엔 조금 더 평온할 수 있길, 꾸밈없는 성숙함이 배어 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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