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날 걸 알았더라면
이번 여름은 코비드에 걸려 자가 격리했던 초반 5일을
제외하곤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힘들기도 했지만- 특히 오늘은 무얼 먹이지 라는 고민- 충분히 함께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고, 특히 아이들도 아침잠이 많은 편이라 다 같이 늦잠 자며 있는 힘껏 게으름 부릴 수 있는 시간들이 누리는 와중에도 아쉬울 정도로 좋았다.
그렇게 긴 여름휴가의 끝을 향해 가고 있던 무렵, 남편이 생각지도 못했던 휴가를 얻게 되면서 가족 여행을 가게 되었다. 표를 늦게 구매한 끝에 직항이면 세 시간 조금 넘겨 갈 곳을 경유지를 거쳐 여덟 시간 넘게 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새벽같이 떠나야 했기에 처음 출발하는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까지는 서두르느라 정신없었지만, 경유지에 도착하여 두 시간 정도의 레이오버가 생기자 공항 특유의 설렘을 느끼며 여유를 부려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아이들 또한 항공 여행 중에만 허락되는 특권인 언리미티드 스크린 타임에 들떠 나를 찾을 생각도 안 했다. 다음 탑승 게이트에 앉아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난 공항 안을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홀로 공항 안을 걸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 또한 공항을 좋아한다. 특히 크고 잘해 놓은 공항들을 보면 비행기 탈 일이 없더라도 그냥 한 번 놀러 오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물론 공항 안의 음식들 혹은 물건들은 대부분 공항 밖에서보다 훨씬 비싼 가격인 경우들이 많기에, 그저 하릴없이 오기에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지만 말이다. 혼자 휘적휘적 자유를 만끽하며 걸으면서 내가 공항을 왜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단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도 사람 구경하며 이것저것 상상해 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공항은 참 재밌는 곳이다. 내리자마자 미팅에 참석해야 하는지 깔끔한 비즈니스 룩으로 차려입은 사람들부터 비행기 안에서도 내 침실 같은 편안함을 누리겠다는 각오로 무장한 듯한 파자마 룩의 사람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그들의 상황들을 생각해본다. 그들 중 과하지 않으면서 편안함까지 잡은, 다음엔 나도 꼭 저렇게 입어보고 싶은 (그러나 결국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을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할 수 있는) 룩을 골라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구두를 닦아주는 곳같이 의외의 서비스들을 제공하는 곳도 있다. 굳이 공항에 이런 곳이 왜 있지? 과연 누가 정말 사용할까? 지나갈 때마다 의문이 드는 그 의자에 정말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자신의 구두를 맡긴 채 앉아 있다. 굳이 이유를 찾아보려면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고 혼자 상상해 보는 편을 택한다. 그 편이 더 흥미롭다.
공항에는 무엇보다 부산한 설렘이 공기에 떠다닌다.
공항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뚜렷한 목적지와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가야 할 게이트가 있다. 떠남과 도착함 사이에 허락된 그 일시적인 시간 동안에는 갇힌 공간에 머물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일탈의 들뜸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들뜸은 묘하게도 우리가 향할 곳과 돌아올 곳이 있다는 안정감을 기반으로 한다.
생각해 보면 나의 뜨거운 여름, 한 계절을 꽉 채웠던 고된 육아도 결국 가을이 오면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직장이 있었기에 들뜨고 아쉬운 마음으로 당장이라도 소멸해 버리고 말 듯한 열정을 가지고 임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살다 보니 끝날 거라는 걸 아는 확신만 있어도 훨씬 수월해지는 일들을 종종 마주친다. 끝날 걸 알았더라면. 그것은 마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말만큼이나 여운을 남기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