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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 Sep 08. 2022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여름의 긴 휴가를 마치고 다시 출근을 하였고, 회사에선 새로운 기점을 맞아 여러 가지 미팅들이 잡혔다. 그중 하나는 ‘Understanding Substance Use and Gangs in * Communities’라는 제목이었고 프레젠테이션은 로컬 경찰청에서 주체했다. 두 명의 경찰관이 맡아서 진행하였는데,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에 올라온 이 지역 갱 출신 힙합 래퍼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하며  노래 가사에 숨겨진 의미와 배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만들던 손동작의 의미를 풀이해서 알려주었다. 라이벌 갱 멤버들을 타깃으로 한 가사와 동작들이었다. 노래가 유명해지면서 청소년 아이들이 별 다른 의도 없이 동작들을 카피하고 따라 부르다 라이벌 갱에게 오해를 사 공격을 당한 에피소드를 말해주며, 숨겨진 의미들을 알아야 하고 혹시라도 그 가사의 표현들과 손동작을 쓰는 학생들을 보면 경각심을 갖고 살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지역 학생들이 우리 병원으로 오는 환자들인지라 환자들을 더 잘 이해하고 돕게 하기 위해 준비된 프레젠테이션 같았으나, 주어진 정보들을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비껴갔고, 그것마저 시간이 모자라 급하게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실질적으로 적용하기엔 애매모호했던 프레젠테이션이었음에도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다. 먼저 그렇게 공격적이고 욕이 난무한 가사를 쓰기엔 그 가수는 너무 어렸고 , 옆에 등장하는 무리들 또한 또래 내지는 더 어려 보였다. 뮤직 비디오에선 총을 발사해 구멍이 뚫리는 이미지를 되풀이해서 보여주었다. 등장한 모두를 삼켜 잠식시켜버릴 거 같은 어둠이 느껴지는 그 영상이 어린아이들까지 손쉽게 접속해서 볼 수 있는 사이트에 올라와 있다는 것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미 그런 마음이 바닥을 뚫고 꺼져 버리는 거 같은 느낌이 들게 한 것은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지금의 갱들은 매우 비즈니스적인 형식을 띠고 있어 갱에 속한 사람들은 due를 지불해야 하는데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가기 위해선 점점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배신하는 행동을 한 경우엔 조직에서 내쳐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시키는 더 많은 나쁜 일들을 해내고 돈을 지불해서 원래 위치로 복귀해야 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한 번 들어온 아이들은 나갈 수도 없다고 하였다. 윗자리를 꿰찬 어른들은 법에도 능통하여, 성인이 되기 전에 저지르는 범죄는 형량이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미성년자들을 꾀어 범죄를 저지르게 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보탰다. 전에 함께 일했던 어시스턴트가 ‘You don’t know here. This is the hood. They don’t leave here because they can’t survive outside. That’s why I gotta leave. If you stay here, nothing’s changing.’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정말 그런 걸까. 검색해보니 저 노래를 부른 래퍼는 살인 혐의로 재판 중이라고 나와 있었다. 정말 이곳에 사는 한 벗어날 순 없는 것일까. 난 모를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그들이 겪을 좌절을, 노출된지도 모르는 채 노출되어 있는 폭력의 민낯을, 빛날 틈도 없이 사그라지게 만드는 부조리함을. 나랑 일할 때까지만 해도 아직 이곳에 살던 어시스턴트는 결국 이사에 성공했을까? 부디 그랬길. 혹시라도 그 계획이 어긋났더라도, 어디에 있든 그저 어쩔 수 없이 주저앉아 버리진 않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퇴근 후, 밖으로 나왔을 땐 착잡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여름 끝무렵 햇살이 쨍하게 빛났다. 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그동안 달구어져 있던 뜨거운 공기가 나를 덮쳤다. 아침에 주차 전쟁을 치르느라 좁은데 이겨 넣은 차를 어떻게 빼야 할지 난감했다. 난감해하는 나를 눈치챘는지 밖에 서 계시던 아저씨는 손짓으로 사인을 주기 시작하셨다. 그분을 시작으로 더 멀찌감치 있으시던 다른 두 분의 도움을 받고서야 차를 무사히 뺄 수 있었다. 열린 창문 새로 ‘Thank you’를 외치는 순간 마음을 가득 메운 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새어나가는 기분이었다. 무겁기만 하던 나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었던 이유가 결국 이 ‘hood’에서 그분들이 보인 작은 다정함 덕분이었다는 것이 너무나 진부하지만, 한편으론 너무나 진부했기에 다행이었다. 벗어날 수 없어 보일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라고 알려주는 거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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