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 걷는 발가락 프로젝트

내 발가락이 먼저 독립했습니다

by 오로보이

에이오 행성에선 인간의 진화가 거꾸로 일어났다.


처음엔 머리만 자율적으로 움직였고,

다음엔 심장, 그리고… 발가락.
인간은 통제할 수 없는 자기 부위와

먼저 협상을 해야만 했다.


1. 문제는 왼쪽 둘째 발가락이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오른발 두 번째 발가락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는 걸 봤다.

"나 오늘 산책 좀 할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그 발가락은 3D 프린터에서 맞춤 신발까지 출력해 자립 선언서를 남기고 집을 나섰다.


나는 더 이상 네 균형만 위해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원한 건,
‘단지 나 자신으로 걷는 것’이다.

2. 독립은 고통스럽고, 웃겼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다.
나머지 아홉 발가락으로도 어떻게든

중심을 잡을 수 있었고,
오히려 내 삶에서 ‘덜 통제된’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문제가 생겼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균형이 살짝 어긋났다.

좋아하던 탱고 댄스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발가락이 쓴 브런치가 너무 인기가 많았다.


"나는 작은 발가락이었지만,
스스로 걸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의무적 균형보다 자발적 흔들림이 낫다."


그 글은 바이럴이 되었고, 수많은 신체 부위들이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이마가 집을 나갔고,
어떤 사람은 오른쪽 눈썹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건 새로운 혁명이었다. '자기 선택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신체 민주주의였다.


3. 발가락 회의소에서


나는 결국 잃어버린 발가락을 찾아 회의소에 갔다.
자율 걷는 발가락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책임에 대한 자율 의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넌 책임감이란 게 뭔 줄 알아?

남을 돕는 거, 팀워크, 그런 거야.”


왼쪽 둘째 발가락이 말했다.
“맞아요. 그런데 당신은 나에게 그런 역할을 선택할

기회를 준 적이 없죠.”


정곡을 찔렸다.
나는 그 발가락을 밟은 적도, 신발 안에

구겨 넣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고맙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저 ‘당연히 거기 있는’ 것으로 여겼다.


4. 사과와 재계약


나는 발가락에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너만의 길을 가도 돼.
다만, 언젠가 우리가 다시 함께 걷는 날이 온다면…

그건 너의 선택이어야 해.”


그 발가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끄덕였다고 느꼈다.)


며칠 뒤, 발가락은 내게 메일을 보냈다.
[재계약 제안서]였다.

역할: 균형 보조 + 방향 감지 + 소소한 리듬감
담당조건: 자율적 의사 존중, 무리한 운동 금지,
월 1회 탱고
허용비고: “내가 걷는 건 내 결정이다. 같이 걷고 싶어서 함께 걷는 것이다.”

나는 서명했다.


5. 그 이후로


나는 지금도 내 발가락과 함께 걷는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이제는 매일 아침, 내가 먼저 묻는다.

"오늘은 같이 걷고 싶니?"


그리고 어떤 날엔, 그 발가락이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 오늘은 내가 혼자 가볼래.”


그럼 난 그냥 웃으며 말한다.
“그래, 돌아올 땐 조심히 와.”


왜냐하면 그건 나도 배운 거니까.
진짜 독립은 누군가를 떠나기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힘이라는 걸.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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