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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아미티스 Oct 22. 2023

프랑수아 오종의 <사랑의 추억>(2)

원제목 <모래 밑>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문학을 가르치는 마리는 뱅상과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아한 영국식 영어로 천천히 그녀가 좋아하는 버지니아 울프의 한 구절을 읊는다.          


난 미친 것 같아요     

귓가에 음성들이 들리고 정신이 산란해요     

정신을 차려보고 싶지만 되질 않아요     

난 당신에게 행복을 빚졌어요     

당신은 내게 참 잘해줬지요     

하지만 이제 난 더 이상 당신의 인생을 망칠 수 없어요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기 전, 연인에게 남긴 메모예요. 아름다운 죽음인 것 같아요. 전 가르치는 일을 좋아해요. 공부를 계속하려 했지만, 남편과의 관계가 더 소중했기 때문에 조금씩 포기하게 되었죠.     


다른 남자와 마주 앉아 자신이 얼마나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얘기하는 여자만큼 에로틱한 존재는 없다. 남편이 사라졌기에 가능했던 다른 남자와의 만남과, 사라졌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남편과의 관계가 극대화된 순간 여자는 에로티시즘의 정수를 건드린다. 이건 아마도 철저히 계산되어 너무도 자연스러운 시나리오의 결과이고 난 그것을 통쾌하게도 눈치챘다.     


남자의 손이 붉은 드레스를 입고 가느다란 끈이 달린 검은 구두를 신은 여자의 발목을 쓰다듬는다. 여기저기서 나타난 여러 개의 손이 붉은 드레스 위로 겹쳐져 올라와 여자의 몸을 뱀처럼 휘감는다. 절정에 다다르는 여자의 얼굴. 뛰어난 영상미가 돋보인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해야 하는 잔혹한 순간이 온다. 남편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전화 한 통. 그녀는 돌아서서 남편의 이름을 부른다. 이번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온 집안을 뒤졌지만 장은 없었다. 대신 서재에서 나온 의사의 처방전 한 장과 여러 개의 약통. 장은 항우울증 약을 먹고 있었다. 여자는 뭔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남자의 모친을 찾아간다.... 


- 장이 자살을 한 것 같아요. 

- 우리 집안에 자살한 사람은 없다. 그 앤 자살한 것도 아니고 물에 빠져 죽은 것도 아니다. 그냥 사라진 거야 지겨워서. 그 아이에 대해서 네가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얘야. 

- 어머니 어떻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세요. 

- 내가 그 애의 어미이지 않느냐. 

- 전 그이의 아내예요. 

- 너는 그 애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다. 넌 아이도 낳지 않았고 가정을 꾸릴 능력이 없었어. 그래서 내 아들은 우울증에 걸렸고 약을 먹고 있었다. 

- 그이의 시신이 어부의 그물에 걸렸대요. 

- 그 앤 낚시를 좋아했지. 

- 어머닌 양로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가셔야 해요. 

- 나보단 네가 먼저 가야 할 거다... 


확실히 여자들은 생명의 진액으로 이루어진 그 원천이다. 다시 말해서, 노년에 접어든 여자와 땅에 묻힐 일만 남은, 생명의 수액이 다 빠져버린 듯이 보이는 노파가 주고받는 대화의 내용이 이토록 잔혹하게 박진감 넘칠 수 있는 것일까. 그들은 그래서 남자보다 오래 사는 건지 모른다.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서 의사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시신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묘사는 마리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물속에서 3개월을 보낸 시신의 상태는 육안으로는 신분파악이 되질 않으니 입고 있던 수영복을 확인하라는 의사의 말에 마리는 단호하게 먼저 시신을 눈으로 확인하겠다고 고집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25년을 살아온 남자의 것이라는, 완전히 해체된 육신을 두 눈으로 본다. 그러나 막상 유품인 수영복과 시계를 내밀자, 마리는 폭소하며 그건 남편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다시 바닷가. 마리는 모래사장에 앉아 오열한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들. 정말로 서럽다. 이제는 남편의 죽음을 정말로 인정하는 듯이 보일 만큼 서럽고도 서럽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이쯤에선 보는 이도 이제 끝나겠구나 일종의 안도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까지 잔혹하다. 멀리로 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에, 마리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언뜻 한 자락 미소를 머금고 남자를 향해 달려간다. 미친 듯이. 하지만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 본 사람들은 안다. 그녀가 달려가는 방향은 남자에게로 똑바로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그녀가 달려가는 목표물은 또 다른 미망(迷妄) 일뿐이라는 것을.   


  

Photo : Les films Séville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중년의 여인이 느끼는 절망과 배신, 그에 의례히 따르게 되는 자아 성찰 그리고 독립적인 여자의 삶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하는 ‘위기의 여자’류의 이야기보다, <사랑의 추억>은 ‘남겨진 여자’의 실체를 양파 껍질 벗기듯이 벗겨낸다는 점에서 훨씬 사실적이고 진솔해서 잔인하다.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인가, 남겨진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가? 혹시 이 영화의 주제는 사랑하는 여자는 독립적일 수 없다 그런 건 아닐까? 혹은 조금 격조 있게 풀어보자면 추호도 상상해 보지 않은 충격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의 인간 행동 양식의 고찰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건 여자에 관한 얘기다.     


나는 이렇게 계속 쓰고 싶다. 영화에 대해. 영화 속 이야기에 대해. 배우와 감독에 대해. 자잘한 디테일에 대해. 그리고 너와 나와 우리의 삶에 대해. 하지만 직장의 후배가 지나가는 말로 요즘엔 다들 영화를 놓고 얘기가 너무 길다고 불평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면서 나 자신도 이야기가 너무 많다. 영화를 직접 보는 것 이상, 계속 쓰고 싶다는 욕망을 잠재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뭔가를 계속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일수록 더욱 그렇다. 분명한 건,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존재의 흔들림을 느꼈다. 파도에 모래알이 흔들리는 것처럼. 영화의 원제목인 ‘모래 밑’이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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