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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n 10. 2022

아이패드만 있으면 잘 할 수 있다고!

얼마 전 남편이 산책하다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 필요한  있어?" 

"아이패드." 

남편의 작은 눈이 갑자기 커지더니 말없이 껌벅껌벅거렸다. 놀랄 수밖에. 생일, 결혼기념일 선물로 원하는 걸 물어도 '없다‘고 말하던 아내가 1초의 머뭇거림 없이 고가 IT 제품으로 화답하다니. 그러게, 특별한 날도 아닌데 왜 필요한 걸 묻는단 말이오. 이렇게 허를 찔릴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남편은 거듭 물었다. "진짜? 당신이 아이패드를?"


난 애플 제품을 써 본 적이 없다. 아이패드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평소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 보지도 않고 노트북은 오직 문서 작성과 검색, 강의 준비로만 쓴다.


"선생님은 정말 유용하게 쓸 거예요."

책 읽고 필사하고, 자료를 모아 강의 준비하는 걸 아는 지인이 내게 아이패드를 권한 게 1주일 전이었다. 글 쓰고 읽는 일만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던 참이었다. 도서관에 가면 세상에 읽고 싶은 책은 어찌 그리 많은지. 글쓰기 책을 보면 글쓰기 모임하는 멤버들이 떠오르고, 에세이를 보면 함께 독서모임하는 이들이 떠올랐다. 눈여겨 보던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도서목록에 저장. 누군가 괜찮은 책이라고 언급하면 그 역시 또 저장. 읽어야 할 책들이 굴비 엮듯 차곡차곡 쌓여갔다. 도서관에서 가방 미어터지게 책을 빌려오면서도 북트럭에 두고 나와야 하는 책이 눈에 밟혔다. 빌려온 책 일부를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하는 일도 늘어갔다. 그런데 읽고 쓰고 자료로 모아두는 일에 속도를 낼 수 있다니. 아이패드만 손에 넣으면 일을 아주 잘 할 수 있을 듯했다.


구체적인 제품 스펙을 물어보는 남편에게 한 마디만 건넸다. "퍼플." 슬쩍 찾아본 아이패드 컬러 중에 연보랏빛이 있었다. 신제품이 아니어도, 사양이 좀 떨어져도 상관없는데 컬러만 '퍼플'이면 좋겠다는 내 말에 남편은 얕은 한숨을 쉬더니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 영롱한 보랏빛은 최근 출시된 아이패드 에어 5세대에만 있었다. 남편은 불현듯 생각난 인맥을 활용해 2주도 되지 않아 반짝이는 아이패드를 내게 안겼다. "내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해." 아이패드 커버, 펜슬, 아이패드 정품 키보드까지 완벽하게 챙겨준 남편의 어깨가 봉긋 솟았다. 다 합해 100만원이 훌쩍 넘었다는데, 안 그래도 남편 지갑이 얇은 걸 아는데, 아내가 뜬금없이 던진 말 한 마디에 초스피드 실행력을 발휘한 게 감동이었다. "고마워요, 여보." 눈물까지 끌어모아 하트를 날리는 내게 남편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투자야. 열심히 일하셔."


아이패드 에어 5세대_퍼플


남편과 두 아들에 둘러싸여 화려한 언박싱을 마치자 아이패드는 뽀얀 자태를 드러내며 아름답게 반짝였다. 하지만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두기를 며칠. 세 남자의 성화가 무색하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카카오톡 페이까지 되도록 애쓰는 데 1시간이 걸렸다. 톡톡 소리를 내며 펜슬로 우아하게 아이패드에 메모하기까진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이패드를 쓰기 시작한 지 3주가 됐지만 여전히 신문물은 내게 낯설다. 태블릿을 노트처럼 세워두고 일하다가 갑자기 화면이 가로로 돌아가 버리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나를 보는 이 없는데 혼자 얼굴이 빨개져 있으면 옆에 있던 큰아들이 눈치를 채고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화면을 돌려준다. 아들이 매만지면 듀얼 화면도 된다. 흐미, 멋진 아들. 아들을 바라보는 내 눈빛과 달리 아들은 어미를 가엾게 쳐다본다.


철저히 아날로그 인간인 난 종이 위에 노란 스테들러 연필과 0.7밀리 제트스트림 검정 볼펜으로 쓰는 걸 선호한다. 두꺼운 바인더 속 깨알같은 일상 스케줄과 아이디어 메모, 강의 커리큘럼 등은 아이패드로 아직 이사오지 못하고 잠자고 있다. 능숙한 아이패드 유저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은 듯하지만 남편은 내가 아이패드를 펼칠 때마다 '있어빌리티'하다며 홀로 감탄한다. 누가 물어보면 "아이패드 에어 5세대"라고 꼭 힘주어 말해야 한단다. 남편은 시시때때로 아이패드를 잘 활용하고 있는지 확인한다. 고수익을 기대하는 대주주답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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