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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20. 2021

봄날의 취재

과천 경마장과 벚꽃놀이

"기자님, 정문 말고 뒷길로 오세요."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그 길이 아니란다.

"주말이라 주차가 힘드실 겁니다. 뒷문 열어드릴테니 거기로 들어오세요."

아니나 다를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보러 온 이들로 과천 경마장 주변은 북적였다. 경마장 큰 길 주변은 이미 수많은 택시들과 주차된 차로 송곳 하나 들어갈 틈도 없어 보였다.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뱀처럼 길게 늘어선 차들을 휙 지나 달린다. 가끔 취재 명목으로 누리는 기자의 특권이다.


한적한 뒷길을 돌아 서울랜드로 가는 길목 어디쯤, 교관이 기다리고 있다. 세상에, 여기로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니. 울퉁불퉁 흙길을 가로막던 나무 펜스가 젖혀진다. 평소 경마장 관계 차량만 출입하는 문이다. 벚꽃나무 길을 지나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꽃 냄새가 진동한다. 꾸릿한 말똥 냄새 대신 달큼한 꽃향기. 봄엔 꽃이 갑이다.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던 때, 교육 섹션 기사가 내 몫이었다. 그 달 주제는 아이들이 배우면 좋은 '이색 스포츠'였다. 아이스하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승마 수업 현장을 섭외했다. 흔한 종목은 아니지만 이미 이를 배우고 즐기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집엔 태권도와 축구가 세상 전부인 줄 아는 녀석들이 있는데.


과천 경마장의 승마 수업은 강남 엄마들에게 유명하다고 했다. 교관은 모두 마사회 소속 기수 출신인데다 마장 관리가 잘 돼 있고 말 상태도 양호했다. 마사회의 든든한 지원 덕에 사설 경마장에 비해 수업료도 저렴한 편이었다. 등록 기간이면 순식간에 마감돼 대기자도 상당했다.


난생처음으로 마장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마장은 깨끗하고 넓었다. 말들은 윤기가 흘렀다. 나라에서 관리하는 말은 역시 달랐다. 매끈한 등, 기다란 갈기와 꼬리. 살짝 도닥이며 만져보고 싶었지만 강아지 무서워서 곁에도 못 가는 겁쟁이라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승마복을 갖춰 입은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배정받은 작은 말을 마장에서 꺼내 마구를 얹는 것부터 시작이다. 초등학생들인데 자세가 곧다. 특히 여자아이들 몸매가 야무졌다. 탄탄하게 올라가 붙은 엉덩이에 절로 시선이 갔다. 너희 부모님은 선견지명이 있구나. 나도 어렸을 때 승마했으면 군살 하나 없는 멋진 몸매에 애플힙이 딱 얹어졌을 텐데. 아쉽지만 이미 버린 몸. 정신을 챙겨 주변을 구석구석 살핀다. 취재를 해야 기사를 막는다.


수업이 시작됐다. 아이들이 큰 원을 그리며 돈다. 눈꽃 내린 하얀 벚꽃 나무와 나지막한 마장, 가지런히 정렬한 말들과 허리를 곧추세운 아이들.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한 폭의 그림이다. 우리 아들도 말 좀 태워볼까. 나 어릴 적 승마는 재벌집 자제나 하는 귀족 스포츠로 인식됐다. 저변이 확대돼 어느새 말과 교감하며 승마를 생활 스포츠로 누리는 아이들을 보니 부럽다. 아들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흐응~!

갑자기 말 한 마리가 성을 낸다. 아까부터 자기 등에 오른 아이가 맘에 안 드는 듯 자꾸 등짝을 출렁거린다. 말과 기수의 기싸움이다.

"고삐 잡아! 말한테 밀리지 말고!"

교관의 고함이 울려 퍼진다. 퍼억! 결국 아이가 말에서 떨어졌다. 아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말에 올라탄 아이들 마음이 쪼그라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몇 해 전 4월 어느 날, 벚꽃이 절정을 이루던 그날. 봄이면 그날이 생각난다. 세상에 아름다운 벚꽃을 경마장에서만 본 게 아닐진대, 황홀하리만치 만개한 벚꽃과 우아하게 말 타던 아이들이 '봄'하면 떠오른다. 주말 오후, 꽃놀이 나온 사람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승마 수업을 받던 아이들. 내 눈은 그들을 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집 구석에 처박아놓고 나온 아이들과 남편이 떠올랐다. 미안하다. 우리도 꽃구경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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