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Jul 01. 2022

거부할 수 없는 라면의 이중성

엄마, 바빠요?


둘째가 문을 두드린다. 시계를 보니 밥때가 지났다.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민 얼굴을 보아하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아, 미안해 아들." "아녜요. 엄마 바쁜데 우리 라면 끓여 먹어도 될까요?" 생글생글 웃는 녀석. 이미 라면 물이 준비된 걸 난 안다.


아이들 어릴 적, 우리 집엔 인스턴트 식품이 없었다. 아토피, 천식, 비염을 달고 병원에 오는 아이들이 그리 안쓰러울 수가 없었다. 알레르기로 고생하던 내게 인스턴트는 독이었다. 날 닮아 알레르기가 생길까 봐 유치원 가기 전까진 아이들에게 우유도 먹이지 않았다. 슈퍼에서 파는 과자, 아이스크림, 젤리 등 입안에 매혹적인 스낵류도 절대 금지였다. "저런 음식 속에는 나쁜 돼지벌레가 잔뜩 들어있어. 뚱뚱한 아빠 배 보이지? 아빠가 엄마 말 안 듣고 돼지벌레를 잔뜩 먹어서 저렇게 된 거야." 아이들에게 시청각 교육만큼 효과적인 건 없다. 두둑이 솟아오른 자신의 배가 갑자기 돼지벌레의 성지가 됐다는 말에 남편은 억울해했지만 아이들은 내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문제는 아이들이 집안 어른들을 만날 때 일어났다. 시댁이나 친정 어른들은 아이가 귀엽다고 달달한 불량식품을 자꾸 손에 쥐어줬다. 아직 아이가 못 먹는다고 설명을 해도 "괘않다. 할아버지가 주는 건 먹어도 돼."라며 아이 입에 자꾸 들이대니 보통 난감한 게 아니었다. 어른들에겐 차마 뭐라 말 못 하고 집에 오면 아이에게 목소리 높여 주의를 줬다. 친정에 갔을 때도 그랬다. 내 그리 말했건만, 친정 엄마는 시장에 따라나선 큰손자에게 시원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물렸다. 아들은 나한테 혼날까 봐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을 멈추고 길 한가운데 서서 후다닥 아이스크림을 빨았다고 했다. 아이 입엔 범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엄마가 먹지 말라고 했지!" 이미 날 보자마자 겁에 질린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그만해라. 애 그렇게 키우는 거 아니다." 옆에 있던 집안 어른이 한 수 거들었다. 화가 났다. 아이를 헷갈리게 만드는 어른들이, 잔뜩 움츠러든 아이가, 무엇보다 그 상황을 의연하게 넘기지 못한 나 자신이 그저 못마땅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가서도 난 식습관을 들이는데 예민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아이들 생일파티나 축구 수업 간식에 불쑥 등장하는 콜라와 컵라면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자꾸 부딪히는 상황이 힘들었다. 집에서 안 되는 음식을 밖에선 먹어도 된다고 하는 게 말이 될까. 아이의 관계를 위해 식습관을 포기해야 하나. 너무 빡빡하게 아이를 키우는 건 아닌지 고민하는 나에게 지인이 말했다. "아니야, 아이들이 크면 엄마가 자기들을 얼마나 귀히 여겼는지 알게 될 거야."


몸에 좋은 음식 먹여 키운 두 아들은 중학생이 됐다.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 어찌나 먹성이 좋은지 가리는 음식 없이 남들 두 배로 먹는다. 그토록 못 먹게 막았던 라면도 이젠 먹는다. 한 번에 2개씩 흡입한다. 아이들이 크면 자연스럽게 그리 되는 거라고 남편은 날 위로하지만 어느 순간 이리 장벽이 낮아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라면뿐이랴. 치킨, 피자, 콜라까지 엄마 눈치 한 번 쓱 보곤 넉살 좋게 외친다. "엄마, 감사히 먹겠습니다!" 대식가이자 미식가인 둘째는 마늘과 파, 햄, 해물을 넣은 자신만의 레시피로 특제 라면을 만들어 먹는다. 다시는 라면을 사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펜트리엔 라면이 떨어지지 않고 쟁여있다. 아이들은 이제 한 술 더 떠서 내게 라면을 끓여 건넨다. "엄마, 면발은 푹 익혀서, 계란은 반숙으로 해드릴게요."



라면을 먹을 때면 마음 한편 죄책감이 올라오지만 그만큼 버텼으면 충분하다고 스스로 도닥거린다. 그래도 밥할 기운이 없을 때,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 아이들이 '라면 먹어도 되냐'라고 물으면 여전히 머뭇거린다. 라면을 허용하기엔 어미로서 건강한 음식을 주지 못한 미안함을 숨길 수 없고, 안 된다고 하기엔 건장한 아이들의 시장기를 발빠르게 누그러뜨릴 자신도 없다. 아이들은 결코 이 틈을 놓치지 않는다. "엄마, 라면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래요. 먹어도 될까요?" 못 이기는 척 웃어버리면 아이들은 바삐 움직여 라면 한 사발을 끓여낸다. 라면을 먹는 일에 너그러워졌으니, 스스로 끓여먹을 줄도 알게 됐으니, 머지않아 두 녀석이 내 품을 떠나겠구나.


김훈 작가는 라면이 '정서의 밑바닥에 박힌 맛'이어서 '한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공연히 먹고 싶어진다'고 했다. 어린 시절, 먹고 싶어도 참아야 했던, 입에 착착 감기던 조미료의 짜릿한 맛을 아이들은 무어라 기억할까. 파 송송 계란 탁 터뜨려 잘 익은 김치 얹어 후루룩 먹는 그 맛, 라면. 아이들의 선호라고 읽고 엄마의 자기 합리화라고 적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금쪽이에 흔들릴 거 없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