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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25. 2022

그놈의 검정 슬랙스

사춘기 아들의 아리송한 패션 감각

"엄마, 저 검정 슬랙스 사도 돼요?"


슬랙스? 

올 초부터 아들의 입에서 나온 단어. 슬랙스.


본래 ‘느슨하다’ 뜻의 형용사인 슬랙(Slack)에서 따온 명칭으로 여유 있는 헐렁한 바지를 가리키는 편안한 하의를 일컫는 용어다. 현재는 통이 넓은 편안한 바지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슬랙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슬랙스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지만 아이가 의미하는 건 그냥 헐렁하고 편한 바지가 아니었다. 아이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건 소위 말하는 '기지 바지', 정장 바지를 의미했다. 열여섯, 자신의 외모에 한창 눈이 꽂힐 때라지만 내가 이제껏 키운 녀석의 취향이라고 하긴 갑작스럽다. 위, 아래 무채색 옷만 입던 놈이,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처럼 만날 똑같은 옷만 입던 놈이 자꾸 옷 사달라는 이야기를 한다. 주구장창 트레이닝 바지만 해지도록 입었으면서 이젠 청바지는 밝기별로 하나씩 있어야 한다고 하더니, 급기야 슬랙스까지 논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들아, 네가 언제 옷에 그리 관심을 가졌다고. 게다가 웬 슬랙스? 우리 집에 그 누구도 '슬랙스'를 즐겨 입지 않거늘. 모르긴 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슬랙스'의 존재를 알게 됐고 입으면 멋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모양이다.


"아들, 슬랙스는 언제 입으려고?"

"반 엠티 갈 때요."

엠티? 요즘 10대 트렌드는 엠티 갈 때 슬랙스를 입는 거니?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랙스’ 이야기를 꺼냈다. 바빠서 못 들은 척,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척, '나중에 이야기하자'라며 슬랙스를 우리의 대화에서 배제했다. 슬랙스를 입은 아이의 모습이 쉬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아이와 어울리지 않을 듯했다. 아들은 엄마의 무관심과 무언의 반대에 더는 안 되겠던지 제 용돈으로 슬랙스를 사도 되냐고 물었다. 제 돈 모아 사겠다는데 말릴 재간이 없었다. 아이는 일주일 가까이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우여곡절 끝에 무신사에서 검정 슬랙스를 주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이 이름이 적힌 택배 상자가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추석 날 아침, 아이는 검정 슬랙스를 입고 제 방에서 나왔다. 하늘색 면티에 까만 정장 바지. 이 무슨 조화인가. 이리 촌스러울 수가. 남편은 놀란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안방 구석으로 들어가 심호흡을 했다. 아이의 취향이 내 것과 달라도 비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겠다고 다짐했던 난 까만 싸구려 정장 바지를 입은 아이를 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엄마, 이상해요?” 아이는 이미 내 얼굴이 일그러진 찰나를 포착한 듯했다. 차마 촌스럽다고 말하지 못하고 ‘교양 있는 현대인답게’ 아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들, 옷을 잘 입는다는 건 T.O.P.(Time, Occasion, Place)에 맞춰 입는 걸 말해. 꼭 비싼 명품을 입어서가 아니라 때와 목적, 장소에 맞게 어울리게 입는 게 옷 입는 에티켓이야. 그게 옷을 잘 입는 이들의 센스고.”


본인의 예상과 다른 엄마의 반응에 아이는 말없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내가 도대체 아이를 어떻게 키운 걸까. 어릴 때 그리 말끔하게 씻기고 단아하게 옷 입히려 애썼는데. 도대체 이 아이는 '어울림', '색의 조화'라는 센스는 어디에다 팔아먹은 걸까. 아, 사춘기엔 뇌가 미친다더니 패션 센스를 관장하는 영역도 잠시 퓨즈가 나갔나.


부모라면 아이가 고심해서 내린 선택을 묵묵히 바라보고 무한 지지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난하고 거부해도 부모는 너른 품으로 아이를 품어줘야 한다고, 많은 자녀교육서는 말했다. 나 역시 그렇게 바르고도 아름다운 태도로 사춘기 아이의 부모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로서 처음 맞닥뜨린 예상치 못한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직접 고른 새 옷을 입은 기쁨은 아이의 몫, 그것을 바라보는 부끄러움은 엄마, 아빠의 몫이었다. 난 아직 그 몫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는 가끔 문제의 슬랙스를 입고 우리와 함께 외출한다. 더 자주, 더 많이 입고 싶지만 엄마의 심기를 고려해 그만큼만 입어주는 게 분명하다. 아이는 슬랙스를 입을 때마다 부모 눈치를 보고 우린 아이 표정을 기웃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감춘다. “우리 애도 힙합 스타일에 빠져서 3년 동안 헐렁한 티셔츠와 바닥을 쓸고 다니는 통 넓은 바지를 입고 다녔어요. 어느 날, 친구들이 촌스럽다고 그랬대요. 그 이후 옷 입는 스타일이 싹 바뀌었어요. 아이가 그때를 얼마나 창피해하는지 몰라요.” 지인이 내게 그러니 3년만 참으라고 했다. 나중을 위해 지금 모습을 꼭 사진으로 남겨두라는 말과 함께.


요즘 난 아이가 슬랙스를 입고 등장하기만을 기다린다. 3년은… 내게 너무 길고, 어서 아이가 훌쩍 자라 바지가 작아지기만을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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