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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14. 2022

글쓰기 결정장애, 별 게 다 결정장애

헤어스타일과 글쓰기의 상관관계


"더 늦기 전에 하라니까요!"

8년째 다니는 헤어숍 원장은 날 볼 때마다 히피펌을 권유했다. 뿌리부터 모발 끝까지 컬이 있는 파마. "그 사자머리를 제가요?" 20년쯤 전 탤런트 김희선이 긴 머리에 꼬불꼬불 파마를 하고 산처럼 거대한 헤어스타일로 등장한 적이 있다. 길고 풍성해서 자유로운 보헤미안 분위기를 풍긴다는 그 스타일.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이 그리 하고 나와 인기였다나. 원장은 이전부터 거듭 제안했으나 난 적극 사양했다. 내가 한지민도 아니고 마흔 중반이나 된 이 나이에 무슨.


내겐 트렌디한 스타일보다 한 움큼씩 빠지는 머리카락이 고민이었다. '탈모'는 중년 아저씨들한테나 나올 법한 말인 줄 알았거늘, 언젠가부터 머리숱이 줄기 시작하더니 머리를 말릴 때마다 이마 위쪽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흉측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니 더 많이 빠지는 것 같았다. 자고로 사람의 인상은 앞머리가 좌우한다. 빵빵하게 앞머리를 부풀려야 한다는 내 요청에 원장이 다시 한번 말했다. "그니까, 히피펌을 하면 머리 뿌리부터 풍성해 보인다구요!"


오만가지 생각으로 표정은 주춤거렸다. 제 아무리 동안이라 믿어도 40대인데 헤어스타일만 어리면 얼마나 볼썽사나울까. 우리 집 세 남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됐다. 강의를 하는 입장에선 차분한 머리가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 굽실굽실 긴 헤어스타일을 한 강사를 사람들은 신뢰할까. 끊임없이 동공이 흔들리는 날 바라보며 원장은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나는 자신이 없지만 그녀는 확신하고 있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엔 분명 완성된 그림이 완벽하게 그려 있을 것 같았다.


두 시간이 훌쩍 넘어 작업이 마무리됐다. 그녀는 전문가가 맞았다. 자신의 생각보다 컬이 훨씬 잘 나왔다고 그녀는 연신 콧소리를 냈다. 나를 매일 보고 사는 남편과 두 아들의 반응도 가히 폭발적이었다. 내가 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리 한 번 해 보면 되는 걸 뭘 그리 망설였을까. 정 이상하다 싶으면 싹둑 자르면 되는 것을. 물론 파마 한 바로 다음날, 파마약 냄새가 폴폴 풍기는 날 보자마자 "그만 머리 좀 자르지?"라고 말하는 센스 없는 지인도 있었지만, 그건 그녀의 의견일 뿐. 피식 웃고 말면 그만이었다. 해도 될까, 하지 말까.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수만 번 돌려 생각하느라 피곤한 인생. 파마 한 번 하고 나니 갑자기 왜 이리 힘들게 사나 싶었다. 매 순간, 입고 먹고 물건을 사는 모든 일에 목숨 걸듯 심사숙고하며 살아가고 있구나.


글쓰기도 그러하다. 해보고 싶은 표현이 있는데 내가 평소 잘 쓰지 않는 말이어서 선뜻 손을 놀리지 못한다. 내가 쓰던 스타일이 아니어서 새롭게 글 쓰는 방식을 바꾸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글이야말로 다시 읽어보고 이상하면 바로 지우면 될 일인데 왜 그리 몸을 사리는 건지. 습작인데도 실패하는 데 시간을 쏟아붓고 싶지 않은 알량한 마음 때문일 게다.


대니 샤피로는 <계속 쓰기>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쓰는 삶이란 용기와 인내, 끈기, 공감, 열린 마음, 그리고 거절당했을 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기꺼이 혼자 있겠다는 의지도 필요하다. 자신에게 상냥해야 하고, 가리개 없이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을 관찰하고 버텨야 하고, 절제하는 동시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기꺼이 실패해야 한다. 한 번만이 아니라 자꾸만, 평생을."


내 생각을 바로 글로 표현하면 촌스러울까 봐, 이상하게 보일까 봐, 결국 실패할까 봐 글 쓰는 걸 주저하게 된다. 그 사이, 우물쭈물하느라 쏟아 내지 않은 나의 생각은 언제 있었냐는 듯 먼지처럼 날아가 사라진다. 때로는 켜켜이 쌓여 점토처럼 견고해져 머릿속에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나오지 못하게 막아버리곤 한다.


글을 시작하기 바로 전 ©orr


글을 더 잘 쓰고 싶어 안달할 때마다 어린 날 나를 돌아본다. 칭찬받고 싶어 안달했고, 잘 해냈을 때 기뻤다.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서, 남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 한없이 움츠러들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게. 그냥 원래 했던 대로 하지 그랬어."라고 아쉬움을 표현했던 어른들의 말. 긍정적인 반응, 격려가 훨씬 많았을 텐데 부정적인 경험이 부풀어 올라 나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걸 여전히 막는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뮈엘 베케트는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 하기"라고도 했다. 우리는 실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롭게 시도했던 조각 하나, 성공 조각 둘, 실패 조각 여럿이 모두 모여 인생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완성 중이다. 모든 조각이 강렬하고 화려한 색깔을 뿜어낸다면 그림은 결코 조화롭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는 하얀 여백도 필요하고 의미 없이 지나가는 점도, 까만 선도, 뭉개지듯 흐려지는 색깔도 필요하다.


거울을 볼 때마다 길게 굽실굽실 거리는 헤어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여전히 머리카락은 자꾸 빠져 걱정스럽지만 당분간 나의 새 스타일을 만끽하기로 한다. 골룸처럼 머리숱이 볼품없이 적어지면 언젠가는 단발을 택해야 할 테니까. 시도한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남는 장사다.



<사진 출처 : 우리들의 블루스_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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