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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Nov 26. 2022

누가 당신 글을 본다고

내 안에 검열관

글을 씁니다. 하얀 화면을 홀로 마주하고. 곁엔 아무도 없습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만 음악을 틉니다. 무엇을 쓸까, 끄적끄적 메모해봅니다. 어이야기부터 시작할지, 어떻게 끝날지 적어보구요. 쓰지 않아도 되는 건 쓱쓱 지워봅니다. 자, 이제 쓰기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우물쭈물합니다. 자판 위에 얹었지만 몇 분째 그대로입니다. 화면 안에 커서는 깜박깜박. 컴퓨터 작동에는 전혀 문제없습니다. 첫 문장이 그럴듯해야 글이 술술 풀리니 이리저리 고민합니다. 이렇게 쓰고 지우고, 저렇게 쓰고 다시 백스페이스 키를 누릅니다. 처음부터 돌아가 다시 읽습니다.


30분째 같은 자리에서 고민하는 당신, 마치 누가 곁에 있는 듯 자꾸 눈치를 보고 있군요! 아무도 없어요. 당신 혼자예요. 초고를 쓰는 시간, 일단 쏟아내야 해요. 움츠러들지 마세요. 당신이 뭐라고 쓰든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요. 그러거나 말거나. 처음 글 쓸 때는 ' just do it!' 그냥 쓰는 거예요.


설마 어제 읽은 책을 떠올리고 있나요? 그토록 유명한 작가의 글을요? 같은 시선으로 당신의 글을 째려보고 있다면 곤란해요. 당신은 아직 다 쓰지도 않았어요. 이제 겨우 두세 줄. 글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는다고요. 못마땅한 눈길 거두세요. 멋지게 출판돼 나온 책은 수도 없이 많이 고치고 다듬은 결과물이에요. 우린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정 못 미덥다면 예를 하나 들어 드릴게요. 자, 당신은 탄광 앞에 서 있어요. 어마어마한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다고 들었거든요. 100캐럿은 족히 된다네요. 무얼 해야겠어요? 어서 캐야죠! 부지런히 땅을 파서 깊이 박힌 다이아몬드를 꺼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열심히 땅을 파고 다이아몬드를 캐는 일이에요. 허리를 숙이고 한참 캐다보면 땀이 흐를 거예요. 맞아요. 캐는 일조차 쉽지 않아요.


이제 다이아몬드 윗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갑자기 채굴을 멈춥니다. 허리춤에 넣어둔 장비를 꺼내 먼지를 텁니다. 다이아몬드를 다듬어야 한다나요? 이런, 아직 아니에요. 다이아몬드 모양이 어찌 생겼는지, 얼마나 큰지 알지도 못하는데 떻게 세공할 수 있나요. 일단 캐고 보자구요. 온전히 모양을 봐야 어디를 어떻게 깎아낼지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쓰다 말고 자꾸 앞으로 돌아가 고치고 또 고치는 당신, 제말 멈추세요. 나중에 글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이제 막 쏟아낸 파리한 문장을 고치겠다고 멈추나요. 애써 고치고 다듬어 완벽한 문장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나중에 글을 다 쓰고 났더니, 그 문장이 겉도는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전체 흐름에 어울리지 않으니 홀딱 드러내서 삭제해야죠. 고친다고 코를 박고 애쓴 문장인데 아까워서 어떻게 지우나요. 전전긍긍,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머릿속에 있던 글의 형태는 얼음이 녹듯, 시나브로 사라집니다.


내 글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알아요. 당신 머릿속에 검열관이 있었다는 걸요. 그는 글에 대한 기대치가 높고 마음이 조급하죠. 아직 그분이 등장할 때가 아니에요. 물건을 검품하려면 일단 물건이 다 만들어져야 하잖아요. 기다리라고 하세요. 다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검열의 기준도 살펴보라고 전해주세요. 이제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마라토너처럼 뛰기를 강요하지 않잖아요? 아이는 천천히, 조금씩 발짝을 떼면서 다리 근육을 만드는 게 우선이죠. 그러니까 기성 작가에게나 필요한 프로페셔널한 검열관은 쫓아내세요. 우린 이제 겨우 글을 쓰기 시작했다요.



그러니 자꾸 오지랖 넓게 불쑥불쑥 튀어나와 이러쿵저러쿵 지적하는 검열관에겐 자물쇠를 채우고 함구를 명하세요. 잔디밭에서 실컷 뛰놀고 올 테니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단호히 말하는 거예요. 진흙밭에 구를 수도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좀 늦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제깍 돌아올 거라는 기대도 접으라고 전해주세요. 신나게 놀다 온 뒤, 몸에 붙은 흙을 털고 말끔하게 할 시간도 우린 필요합니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예의는 갖춰서 나타날 테니 걱정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세요.


아직 집필조차 하지 않은 글을 보려 하는 건 월권입니다. 때가 되면 귀찮도록 불러낼 테니 잠시 편히 쉬고 당신의 머릿속 검열관에게 꼭 일러주시기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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