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Mar 03. 2023

그와 나만 아는 착한 일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근처 카페에 들렀다. 구름이 낮게 깔려 더 으스스한 아침, 햇볕 한 조각 쬐기 어려운 날은 유난히 몸이 무겁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하고 잠시 멍 때리고 있으니 금세 내 커피가 날 부른다. “맛있게 드세요!” 바리스타 목소리가 어찌나 높고 명랑한지 나도 모르게 씩 웃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특별하게 건네는 경쾌함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른 아침부터 음료를 주문하고 받아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두 옥타브는 더 높았을 그녀의 인사 덕에 몸속 깊이 박힌 긴장감이 살풋 녹아든다. 그래, 맛있게 먹고 오늘 하루 힘내자.


도서관엔 사람이 많다. 흐린 날엔 다들 노트북을 챙겨 들고 여길 오는 건지, 나의 ‘페이버릿 플레이스’를 이미 누군가 차지했다. ‘내 자리인데…’라는 말을 삼키고 찾은 곳은 여섯 명이 공유하는 대형 책상. 책 읽다 글 쓰다 강의 준비도 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에 책이 쌓인다. 옆자리로 넘어가지 않게 정돈하고 다시 집중하려는 찰나, 앞자리에 누군가 앉는다. 아, 시야에 걸리는 게 없어서 시원했는데, 아쉽다. 우리 집도, 내 방도, 나만의 책상도 아닌데 가끔 반경 50미터 안 모든 공간을 사유화하고픈 이기심이 발동한다. 방해받지 않으려 고개를 노트북 화면으로 깊이 숙이는데 앞자리 앉는 분의 행동이 예사롭지 않다. 이미 자리 잡은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책도 살살, 필통도 살살, 노트북 어댑터도 조심조심. 거의 고양이다. 세상에 이런 분도 있구나. 코끝에 돋보기를 걸친 할아버님은 손끝마저 단아하다.


살다 보면, 무심하다 못해 거칠고 무례한 이들을 만나 속상할 때가 왕왕 있다. 엄동설한 거센 황소바람을 거슬러 힘겹게 유리문을 열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도어맨 삼아 먼저 쏙 들어가 버리는 사람이나 뒤차가 기다리든 말든 주유 하면서 전화받고 수다 떨고 심지어 화장실까지 다녀오는 이, 코 앞에서 엘리베이터 문을 황급히 닫아버리는 이. 다 사정이 있겠지 이해하려 애쓰지만 잠시나마 느낀 당황스러움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감사하게도, 세상에 이런 이들만 살지는 않는다. 저만치 걸어오는 나를 보고 문을 잡은 채 기다려주는 중년 아저씨, 주유소에 길게 늘어선 주유 행렬 가운데서 주유가 오래 걸려 미안하다고 끄덕 목례를 건네는 앞차 운전자, 무거운 내 짐을 자신의 택배 더미에 올리곤 집 앞까지 운반해 주는 우리 동네 택배 아저씨. 급히 뛰어오는 내 발소리에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고 기다려주는 이를 만날 날은 분주한 일상에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 마음이 상쾌해진다.

나 역시 작은 손길을 보태 누군가를 도와줄 때 차오르는 뿌듯함이 있다. 처음 보는 이의 얼굴에 순간 피어오르는 미소를 발견하는 즐거움. 마치 그와 나만 아는, 착한 일을 주고받은 사이에서 공유하는 기쁨이랄까. 둘째 아이가 어릴 적 동네 할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왔다며 발그레한 얼굴로 웃었던 적이 있다. “엄마, 7층에 전동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가 현관 앞에 계시기에 제가 지나가실 때까지 자동문 닫히지 말라고 서서 기다렸어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저보고 ‘넌 앞으로 크게 되겠구나!’라고 하셨어요.” 사춘기가 된 아이는 지금도 그분을 뵐 때마다 꾸벅 인사를 하곤 내게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엄마, 저분이에요!'  “알아, 아들. 나도 네가 작은 친절을 베풀 줄 아는 꼬맹이여서 기특했어.” 지극히 작고 보잘것없어 무관심해지기 쉬운 것들까지 챙기는 사람. 사소한 친절이 우리 삶을 훨씬 여유롭고 풍성케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흔 넘어 필라테스 하면 생기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