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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pr 14. 2023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지던 순간

글쓰기가 다시 나를 찾아오다

"아니, 그렇게 싫었는데 어찌 기자를 했대?"

기사 썼던 일을 회상할 때면 고개를 있는 힘껏 젓는다. 다시는 하기 싫다는 듯 단호하게.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좋았다. 잘 나가는 이들이 마음을 열면 세상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아픔이 속내를 드러냈다. 때론 친구처럼, 동지처럼, 웃고 울면서 나눈 이야기는 그대로 간직하면 좋으련만, 사람을 만나면 기사를 써야 했다. 사람들이 눈을 뒤집고 미친 듯 클릭해 대는 글을 쓰라고? 그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렵게 입술을 떼어 내게 말해줬는데 그걸 이렇게 까발려야 하나. 10년 넘게 쓰는 직업, 기자를 하면서 수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속물스럽지만 누군가 나를 ‘기자’로 불러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기사’ 쓰는 일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쓸 거리(우린 이를 ‘때거리’라고 불렀다)를 찾지 못한 날은 데스크의 눈총을 받아야 했고, 마감 시간을 훨씬 넘기고도 글이 마무리되지 못한 날은 데스크의 독촉에 시달려야 했고, 기사 물 먹은 날은 데스크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너 뭐 하고 다니냐?” 먹고사는 일은 누구에게나 다 고되다. 그래서 내가 밥벌이로 글쓰기를 안 하겠다고 했던 건데, 내 선택이니 책임져야지 별 수 있나, 견뎌야지. 


맷집이 그다지 세지 못한지라 전날 쓴 기사 반응도 별로고, 제대로 된 쓸 거리도 못 찾고, 겨우겨우 땜질용 기사를 쓰고 있으나 글발 날리지 못하면 괴로웠다. 매일 새로운 글을 생산해야 했다. 내 안에 채워지는 건 없는데 어제도 쓰고 오늘도 쓰고 내일도 써야 했다. 물 한 방울 없는 우물 바닥을 작은 바가지로 박박 긁어내는 기분이랄까. 내게 기자의 글쓰기는 가물어 메마른 땅, 그 자체였다.

아이 둘을 내 손으로 직접 키우겠다고 사직서를 내고 나온 날,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는 “만세!”를 외쳤다. 선배들 앞에선 “죄송합니다. 열심히 아이 키우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지만 회사가 저만치 멀어지는 순간부터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버스 타고 오는 길이 어찌나 길던지. 돈이고 뭐고, 이제 자유다. 쓰는 일에서 해방되는 기쁨이 말도 못 했다. 

1년 넘게 쓰지 않았다. 쓰는 일 말고도 대낮에 하고 싶은 일은 넘쳤다. 큰아이를 유치원에, 작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주어진 오전 시간을 살뜰히 활용했다. 대낮에 백화점 쇼핑하기, 카트 끌고 장보기, 친구들 만나기, 서점 가기. 카페에서 책 읽다가 멍 때리기.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쓰지 않고 읽는 일, 쓰지 않고 생각하는 일이었다. 마감 압박에 시달리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가게 뒀다. 그러다가 뭔가 떠올라 볼펜이 손에 쥐어지면 끼적거렸다. 그동안 쓰지 못했던 글. 결코 공개할 수 없었던 글. 나를 드러내는 글.

누가 쓰라고 시키지도 않은 글을 한 바닥 써놓곤 읽고 또 읽었다. 주제도 없고,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도 없는 글 속엔 나라는 한 사람이 들어 있었다. 햇살이 찬란했던 어느 날 오후에도 아이들 체육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글을 썼다. 북적이던 카페, 사람들의 대화, 시끄러운 음악 속에 자판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어느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주변은 흐릿해지고 오직 홀로 진공 상태에서 가만가만 글을 쓰고 있었다. 고개를 드니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갑자기 머리 위로 별빛이 쏟아졌다. 눈앞을 환하게 밝히는 빛은 내게만 보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쓰는 일에 몰입하는 날,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글쓰기를 심히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쓰는 일을 즐긴다는 사실을. 남이 잘한다고 말해준 일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수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안을 채워야 비로소 에너지가 샘솟는 내게 밖으로 밖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 기자의 글쓰기는 소모적이었다는 것을. 내향적인 내가 기사를 쓰기 위해선 나 자신을 채우는 글을 써야 했다는 것을. 세상을 향한 글을 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일기 한 편 제대로 쓰지 못했던 게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나를 돌아보고 채워야 했다. 그제야 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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