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Jun 23. 2023

아이의 자기 주도와 엄마의 방치, 그 한 끗 차이

 지난 금요일에도 두 아이와 식탁에 마주 앉았다. 한 주간 어찌 지냈는지 돌아보는 '패밀리 타임'. 같은 지붕 아래 살을 비비며 지내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공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각자 정신없이 바쁠 땐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목소리만 오간다. 

"엄마, 제 교복 어디 있어요?" 

"문고리 뒤에 걸어뒀어!" 

"엄마, 양말은요?" 

"개켜 둔 거 거실에 있잖아. 가져다가 네 서랍에 넣으라고 했구만." 

"엄마, 로션 다 썼어요!" 

"욕실장 안에 새 거 있어! 좀 찾아보고 말해."

"엄마!" 

"엄마 그만 불러!"


 며칠 전, 모두 나간 빈 집에서 혼자 점심을 먹다 울컥했다. 가만있자, 2년 반만 있으면 큰 녀석이 떠나잖아. 불현듯 아이에게 쏟아부은 모진 말들, 못다 한 애정 표현이 떠올랐다. 낯선 환경에서 고군분투할 아이 모습에 먹먹해졌다. 독립할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은 건 여전히 많은데, 시간이 너무 없다. 요즘 친한 친구가 누구였더라, 오늘 아침엔 교복을 입고 갔을까, 체육복이었나? 공부한다고 늦게 자던데 무슨 공부하느라 그런 거지? 미안함과 걱정, 불안이 몰려왔다. 내 자식을 남의 아이 보듯 하지 않으려면 '패밀리 타임'이 필요했다.

 

 좋았던 일, 재미났던 일, 속상했던 일을 나누던 우리의 다정한 대화는 식탁에 가지런히 놓인 아이들의 주간 일정표로 옮겨간다. 군데군데 허연 구멍이 보인다. 일주일 전, 아이들은 단단히 약속했다. "해야 할 일 체크 잘할게요. 숙제는 미리 할게요. 졸리다고 할 일 미루지 않을게요." 그랬건만, 아이들 표정은 참으로 다소곳하다. 지난주도, 지지난주도 그러했다. 머릿속에 갑자기 수많은 생각이 파도친다. 작정하고 시작하면 아이들에게 지난주의 행적을 꼬치꼬치 캐묻고 빈틈없이 혼내다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너그럽고 여유롭게, 끝까지 이 기조를 유지하리라 다짐한다. 아이들이 조개처럼 입을 다물면 곤란하니까. 잔소리를 씹어 삼키는 대신, 난 콧구멍을 넓게 벌린다. 흐으응.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이 여럿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주도력', '자기 조절력'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1980~9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했다. 일괄적으로 짜인 환경 속에서 착실하게 달린 내게 1차 충격은 대학 입학과 함께 왔다. 강의와 강의 사이, 공강 시간을 잘 보내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도서관에 가자니 날씨가 너무 좋고, 놀자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연애를 뜨겁게 한 것도 아니고. 극심한 아노미 상태였다. 결혼 후, 어렵게 유지하던 워킹맘의 삶을 버리고 육아에 전념했다. 아이들이 10대가 되고 나니 2차 충격파가 다시 일상을 덮쳤다. 내 몸을 혹사해 가며 돌봐야 할 아이들은 더 이상 없고, 식사준비와 설거지, 빨래, 청소도 가족과 분담하니 장만 봐 두면 내가 할 일도 딱히 없었다.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누리는 시간이 늘어갔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데도 가끔 어떤 것을 해야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걸까, 고민하다 공황상태에 빠지곤 한다.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일찌감치 사교육과 거리를 뒀다. 아이들이 행복한 자기 주도적 인간으로 자라길 바랐다. 학교 공부에 충실하고, 숙제는 꼬박꼬박 할 것. 평소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분량을 정해두고 매일 할 것. 모든 걸 끝내면 놀든, 자든 전적으로 아이들 자유에 맡겼다. 아이들은 성실하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많았다. 학교 숙제는 빼먹지 않는데 성경 읽기, 수학 연산 풀기, 책 읽기, 악기 연습하기 같은 '중요하지만 급하지 않은 일'은 빈칸으로 남겼다. 아이들과 마주 앉아 왜 빈칸일 수밖에 없었는지 물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달리 없었다. 애나 어른이나 인간은 다 똑같아서 피곤하고 졸릴 때 그저 침대로 직행했을 뿐이다. "다음 주엔 잘해보자."라고 부드럽고 우아하게 타일렀으면 좋았으련만, 내 목소리는 때때로 천장을 뚫고 나갔다. "죄송해요, 엄마. 앞으로 잘할게요." 물론, 평화롭고 화목하게 마무리될 때도 많았지만, 아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건네는 말로 나의 단독 '푸닥거리'는 이따금 막을 내렸다. 아니, 종종, 제법 자주, 여러 번.


 "아이가 알아서 계획하고 공부하도록 지켜보려고 하는데요. 내가 이런 미명 아래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들어요." 얼마 전, 고1인 큰아이 친구 엄마들을 만나 속마음을 털어놨다. 맞은편에 앉은 00 엄마가 말했다. "저도 그래요." 아이가 스스로 선택의 기회를 갖고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격려하고,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믿어야 아이는 자기 주도적 인간으로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 조금 서툴고 늦더라도 한 발짝 물러나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한데, 아이를 믿다가 발등 찍히진 않을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놓치는 게 아닐까, 조바심이 압도하곤 한다.    

 

  두 딸을 음악가와 변호사로 키운 가수 이소은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에게 뭘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어요. 하지 말라 해도 하니까, 생각이 있으면 하다 돌아오겠죠. 그때까지 기다려주는 건 좀 있었습니다." 부모로서 큰 그림 안에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아이를 신뢰하고, 내 생각보다 조금 더뎌도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 사춘기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지금 내가 내리는 결론이다. 내일 아침, 늦잠 자는 아이를 보면 또 울화통이 터질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가 다이어트를 한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