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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y 08. 2023

아이가 다이어트를 한답니다

중2 아들의 단단한 결심

둘째 아이가 다이어트에 돌입했습니다. 벌써 19일째입니다. 

발단은 학교에서 올려준 영상이었습니다. 반 친구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춤추는 장면이었는데요. 영상 초반, 카메라 초점이 채 맞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남극 바다 앞, 수백 마리에 달하는 펭귄 가운데에서 자기 새끼를 찾아내는 어미 펭귄처럼. 차라리 알아채지 못했으면 좋았으련만, 한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덩치, 그냥 내 자식이었습니다. '난 정말 하기 싫소'라는 표정을 한 채, 최소한으로 손과 발을 까딱이는데 커다란 씨름선수가 두꺼운 어깨를 두리둥실 밀쳐대는 모양이라고나 할까요. 혼자 킥킥거리며 웃다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난 저 녀석의 어미다. 언제 저리 거대해졌는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가. 불현듯 슬퍼졌습니다.


 영상을 멈췄습니다. 더 보면 슬프다 못해 화가 날 것 같았거든요. 내 그리 조금 먹으라고 했건만,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고 했건만. 청소년기 한창 성장할 때라고, 많이 먹으면 다 키로 간다고 말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남편. 아이에게 대식가와 미식가의 DNA를 넘겨준 그는 국밥을 먹을 때 공깃밥을 추가했습니다. 그렇게 잔뜩 먹고 아이가 디저트가 필요하다고 하면 명랑 핫도그의 '감자 통모짜'를 사줬고, 바로 햄버거 가게에 들어가 입가심으로 버거 하나씩을 물렸습니다. 이 원망스러운 자 하고는. 아이는 매우 자주 먹을 걸 찾았습니다. 공부하다 지루하면 "배 고파요", 짜증 나면 "기분전환이 필요해요. 뭐 먹을 거 없어요?" 저녁을 먹고 난 직후 "출출해요"라며 끊임없이 입속에 고칼로리 간식을 넣던 아이가 미워졌습니다. 


 어쩌다 작고 귀엽던 녀석이 영화 <빅 히어로>의 '베이맥스'처럼 어깨부터 엉덩이까지 구분이 사라졌을까. 턱선은 고사하고 그냥 서 있어도 절로 두 턱이 되어버리는 후덕한 얼굴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 기분이라면 아이에게 비난을 쏟아낼 게 뻔했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너 뚱뚱해 보인 거 알아? 엄마가 그만 좀 먹으라고 했지?"라고 시작하면 아이의 감정만 상할 것 같았습니다. 이제껏 제가 아이 식습관에 수없이 말했어도 이 지경에 이른 건 내 말이 영양가 없는 잔소리로 전락했기 때문이었겠죠.


출처 : 영화 <빅 히어로> 스틸컷

  

그날 저녁 식사 후, '가족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남편에겐 최대한 빨리 귀가하라고 연락했습니다. '심각한 사안임. 무슨 일인지 와 보면 알게 됨.' 아이들 중간고사 기간이었지만 미룰 수 없었습니다. 자꾸 오후에 본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눈코입이 파묻힌 그 얼굴과 넉넉한 티셔츠도 감추지 못한 똥배의 곡선을 상기하며 의지를 다졌습니다. 내 오늘 반드시 변화를 이끌어내리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인 세 남자에게 말없이 문제의 영상을 틀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엄마가 널 놀리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춤을 못 춰서 혼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엄마는 지금 무척 심각해. 네 눈에는 뭐가 보이니?"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그동안 아이의 식습관과 생활 태도, 앞으로 지속될 경우 일어나게 될 문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알겠어요. 이제 조심할게요." 둘째가 나지막이 대답했습니다. 생각보다 순순히 받아들입니다. 영상 속 자신의 모습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우리 둘째 듬직하고 귀엽구먼." 둘째 기가 죽을까 한 마디 거들던 남편은 흰자위 가득한 제 눈을 볼 수밖에 없었구요. 그날로 우리 집엔 라면과 과자, 치킨과 피자 반입이 금지됐습니다.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먹는 양을 줄였습니다. 간식도 끊었습니다. 학교 급식에서도 밀가루 음식, 튀김류 등 고칼로리 반찬이 나오면 스스로 양을 제한합니다. 하굣길, 친구들과 편의점에 들러 라면과 삼각김밥 2개 먹는 일도 멈췄습니다. "아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이번엔 꼭 살 뺄 거예요." 예상보다 단호합니다. 아이를 위해 전 아침마다 샐러드를 준비하고 계란을 삶느라 무척 분주하지만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제하는 둘째가 기특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네요. 제 간식 메이트가 사라졌습니다. 빵도 사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 먹으러 가야 하는데 둘째가 완강히 거부합니다. “엄마, 다이어트 중이라니까요!” 해가 떠 있는 낮 동안엔 괜찮다고 꼬셔도 절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먹을 것을 권한 게 엄마인 저였다는 사실을요. 오물조물 입으로 들어가는 게 예뻐서 같이 나눠 먹고 아이에게 더 먹이고 또 먹였다는 것을요. 아, 누굴 탓하겠습니까. 죄책감과 함께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이제 저도 다이어트를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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