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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21. 2023

15년 동안 23만 킬로미터를 달리다

조금만 버텨봐. 아직은 아니야.
네가 노쇠한 건 알지만,
매일 100킬로미터를 거뜬히 달려주는 게 고된 일인 건 알지만,
그렇다고 탈탈거리다 속도를 늦추고 주저앉으면 안 돼.
고속도로에선 더더욱.


15년 전, 2009년 4월 서울 여의도 증권가 한복판에서 나의 첫 차를 만났다. 당시 흔하지 않던 아이보리 색의 박스카. 우유빛깔 새 차를 받자마자 바로 퇴근길 올림픽 대로를 달렸다. 운전 경력이라고는 드넓은 미국 주택가에서 1년 동안 설렁설렁 다닌 게 전부. 이후 7년 동안 장롱 면허였는데 남편은 놀라운 믿음으로 나 홀로 운전대를 잡게 뒀다. "할 수 있어. 집까지 조심해서 잘 가봐."


뱃속엔 5개월 된 둘째가 있었다. 주유구를 연답시고 이것저것 만지다가 보닛을 연 채 달리기도 하고, 방향등을 켜다 마주 오는 차에 하이빔을 쏜 적도 있지만 대체로 도로교통법을 준수하며 안전 운행을 했다(역주행은 딱 한 번밖에 안 했다). 어찌 됐건 난 봉긋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더는 버스를 타지 않는 것이 좋았고, 두살배기 첫째 아이를 배 위로 걸쳐 안고 다니지 않아서 살 것 같았다.


머지않아 내 차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 영화가 등장했다. 변신 자동차 또봇. 동네 꼬맹이들은 조그만 내 차를 보면 두 눈을 크게 뜨고 몰려들었다. “아줌마, 저 타봐도 돼요?” 독일산 고급 세단을 타고 다니던 아이 친구 엄마는 내 차를 타고는 말했다. “oo엄마, 트럭 탄 것 같아.” 그래도 그녀의 차만큼은 전혀 부럽지 않았다.


그 차와 함께 두 아이는 자랐다. 병원을 다니고 어린이집, 유치원을 오갔다. 청계산 자락 숲학교를 다니던 아이들은 진흙으로 온몸을 휘감고 차에 올라탔다. 배고프면 차 안에서 밥을 먹었고 졸리면 입을 헤벌리고 기절하듯 잤다. 작은 차에 아이 친구들 모두 태우고 여기저기 체험학습을 다녔고, 커다란 여행 트렁크를 싣고 통영, 진주, 여수, 순천, 전주, 속초, 강릉, 제천, 단양, 인천 등 전국 각지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그렇다고 항상 기쁘고 즐거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길은 막히고 약속 시간은 다 되어 가는데 어린 녀석들이 내 마음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을 때면 성질 고약한 어미는 분노했다. 큰아이의 분리불안이 극에 달했던 시절, 아이는 차에서 자다 깨면 소리를 지르고 엄마에게 안아달라고 손을 뻗었다. 뒷자리에서 차가 흔들리도록 울어재꼈는데 운전하느라 안아줄 수 없던 나는 같이 고함을 치며 아이 울음을 멈추려 했다. 격한 부부싸움도 종종 일어났다. 우린 집에서 뾰로통한 채로 출발해 신호가 걸릴 때마다 언성 높여 날카롭게 다퉜다. 남편이 내 마음을 몰라준다며 길가에 차를 세운 후 엉엉 운 적도 있다. 내차 앞 유리창은 비교적 투명했다.


그래도 우린, 그 자그마한 차 안에서 같이 노래 불렀고, 성경말씀을 암송했다. 아이들은 책을 읽었고 영어 단어를 외웠으며, 목젖이 보일 정도로 까르르까르르 넘어가게 웃었다. 고사리 손을 모으고 엄마가 안전하게 운전하기를 기도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숨 막힐 듯 꼬릿한 땀내를 풍기는 청소년이 됐다. "차 깨끗하게 타셨네요. 이 차 타고 돈 많이 버셨어요?" 우리에게 첫 차를 팔았던 자동차 딜러를 얼마 전 다시 만났다. "돈보다...아이들이 잘 컸어요."


15년 동안 23만 5575킬로를 달린 나의 쏘울. 우리 식구와 다를 바 없던 소박한 첫 차. 큰돈을 들여 손세차를 하고 월요일 아침 아이들 등교를 시킨 후, 운행을 마무리했다. 그토록 새 차를 기다렸건만 막상 열쇠를 남의 손에 넘기려니 애잔한 마음이 든다. 우린 한 평이 조금 넘는 곳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울었다. 땡큐. 마이 쏘울.


나의 쏘울, 마지막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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