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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ug 27. 2023

우린 소설 따윈 읽지 않습니다

(우린 자기 계발서만 읽습니다.
소설 같은 문학은 읽지 않습니다.)


어느 독서모임에서 모집 공지를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독서모임의 성격, 책 선정 배경을 설명하면서 괄호 안에 넣은 말. 부차적인 설명을 덧붙였다는 뜻이었지만, 마치 작은따옴표를 붙인 듯 다른 어떤 글보다 눈에 쏙 들어왔다. '소설 같은 문학은 읽지 않습니다.'


짐작컨대, 문학을 읽지 않는다는 말엔 이런 의미가 내포돼 있다. 첫째, 우리가 집중하는 분야는 '자기 계발'이라는 명확성, 둘째, '자기 계발'에 관심 있는 사람만 대상으로 한다는 뾰족한 타겟팅, 셋째, 그러니 해당 책을 읽고 모임에 참여하면 '자기 계발'에 분명 도움이 될 거라는 자신감, 넷째, 자기 계발과 문학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는 구분, 다섯째, 자기 계발과 상관관계가 없는 문학을 읽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결연한 의지.


자기 계발과 문학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은 문장을 읽으면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이 떠올랐다. 어릴 적 만화 주인공이었던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마흔 너머 다시 만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길을 즐겁게 달리기로 마음먹었어요. 경험상 그래야겠다고 마음만 굳게 먹으면 즐겁지 않은 일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물론 마음을 정말 단단히 다잡아야 하지만요."

"아, 모르세요, 아주머니? 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는 분명 한계가 있어요. 제가 그 한계에 다다르면 제 실수도 끝나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에 정말 위로가 돼요."

"작은 '칭찬'이 때로는 세상에서 가장 충실한 '교육'만큼이나 좋은 효과를 내는 법이니까."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리라 믿어요.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에요."


빛이 밝으면 어둠이 드리울 자리를 잃듯, 주어진 환경을 기꺼이 내 편으로 만들어버린 앤. 그녀의 어록은 인생을 알아버린 현자의 잠언과 다를 게 없다. 꿈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걸, 행여 플랜 A가 막힐지라도 플랜 B가 기대치 않은 선물처럼 펼쳐진다는 걸 보여주는 그녀.


델리아 오언스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 주인공 카야의 삶은 더 기구하다. 어린 나이에 가족들은 모두 떠나고 낡은 판잣집에서 홀로 남겨진 그녀는 원시 소녀처럼 야생에서 목숨을 부지한다. 정규 교육 한 번 받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을 견뎌가며. 결국 그녀는 생존을 넘어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가꾸고 사랑하고 성공한다.


소설가 장강명은 <소설가라는 이상한 직업>에서 "소설이야말로 사유와 사변을 담는 예술"이라며 그게 "문학적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대상을 두루 생각하고(사유 思惟), 사물의 옳고 그름을 생각으로 가려내는(사변 思辨) 법을 알아가는 데 소설만큼 좋은 게 없다는 뜻이다. 사유와 사변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정신활동이지만 쉬이 결과물이 내어주지 않는다. 1분 1초가 급한 요즘, 남보다 더 빨라야 하는 자기 계발, 성공 방정식과는  거리가 멀다. 때문에 '문학적'이라는 말에는 생존, 경쟁과는 무관하게 인생과 아름다움을 논한다는 인식이 숨어 있다. 철딱서니 없이 이상향을 꿈꾸는 선비 같다고나 할까.


문학을 멀리 하는 건 비단 특정 부류만의 일이 아니다. 온라인 서점 예스 24에서 발표한 올해 상반기 분야별 도서 판매량에서 '자기 계발서'는 작년 상반기보다 33%나 늘었다. 반면 소설, 시, 희곡 같은 문학은 14.2% 줄었다. 독서인구는 갈수록 적어지고, 그나마 읽는 사람들도 자기 계발서를 손에 쥔다. 감수성 풍부한 10대 청소년들도 소설을 읽지 않는다. 그저 요약된 줄거리와 문학사적 해석만 머릿속에 넣을 뿐이다.


사실 소설처럼 다양한 인간상을 만나기 쉬운 장르도 없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 세상만사 천태만상이 존재한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나 삶을 꽃피우는지 소설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 이민진의 <파친코>를 읽으면서 우린 소설 속 인물들의 행적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허공에 눈을 얹어 생각하게 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 번뿐인 인생, 작가가 빚은 인물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참되게, 제대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우린 자기 계발서만 읽습니다. 소설, 시 같은 문학은 읽지 않습니다."

그 말 사이에 소설 '따윈' 읽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는 건 지나친 오해일까. 갈수록 돈이 전부가 되어 가는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마저 '좋아요', '조회수' 같은 숫자로 해석되는 시대에, 성공한 누군가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실수 없이, 실패 없이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지 모른다. 시에 '앤'이 되고 '조'가 되고 '카야'가 되고 싶은 마음 또한 공존하지 않을까. 난 오늘도 소설을 읽으며 궁극의 자기 계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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