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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May 12. 2023

이력서에 기껏 한 줄 더 붙이겠다고

놀이동산. 회전목마를 시작으로 웬만한 놀이기구를 다 타고 롤러코스터가 남았다. 줄이 상당히 길다. 탈까 말까. 무서울 것 같은데. 고민스럽다. 친구들에게 "나 롤러코스터 타봤다!"라고 자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새 난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안에 서 있다. 

      

슈웅! 꺄악! 바람을 가르고 쾌속 질주하는 열차는 순식간에 내 머리 위를 지나쳤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오싹했다. 한 발 한 발 롤러코스터 입구에 가까이 갈수록 너무 떨렸다. 그냥 타지 말까? 내가 안 탄다고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줄에서 빠져나가면 끝날 일이다.  "롤러코스터도 탔어?"라고 누군가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무서워서 중간에 포기했어." 이건 창피했다. "당연하지. 무섭지만 잘 탔어. 막상 타 보니까 괜찮던데. 엄청 재미있었어." 이렇게 으스대고 싶은데 그러려면 긴 줄을 이탈해선 안 됐다. 

    

 입술이 파랗게 질러 바르르 떨렸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껏 서서 기다렸는데. 타자. 한 번만 눈 꽉 감으면 되겠지. 1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수백 번 마음이 오락가락 한 끝에 내 순서가 왔다. 이젠 도망갈 수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 롤러코스터에 오른다. 결국, 난 롤러코스터를 탄다. 조금만 버티면 학교 가서 친구들한테 뻐길 수 있다. "너 자연농원 가서 롤러코스터 타 봤어? 난 타봤거든!" 이 한 마디를 말하기 위해 뱃속에 나비 열 마리가 날아다니는 듯 들썩이는 마음을 안고 줄을 서서 기다렸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가는 공포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으며, 롤러코스터가 끝도 없이 하늘 위로 천천히 치솟을 때 언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할지 몰라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질러야 했다. 



10살 나이에,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여전히 생생하게 내 몸이 기억하는 사실, 무엇을 했다고 말하려면 그걸 내가 직접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가 봤다"는 문장 속에 왕복 10시간의 고된 산행이 들어 있고, "760페이지에 달하는 '총균쇠'를 완독했다"고 말하기까지 잠을 참고 겨우겨우 책장을 넘긴 인내심이 자리한다. 아마 죽을 때까지 번지점프를 했다거나 패러글라이딩을 타봤다는 말은 결코 내 입에서 나오지 못할 게다. 

    

"오, 대학에서 강의도 하세요? 실력이 대단한가 봐요. 대학에서 특강 해달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면 직접 강의에 서야 한다. 하기 싫은 마음을 누르고, 강의 준비에 대한 압박을 이겨내야 한다. 못하면 어쩌지? 학생들 반응이 없으면 어쩌지? 걱정, 근심, 두려움도 이겨내야 한다. 어떻게? 충분하게 준비하고 실제 잘해 내는 방법밖에 없다. 매번 새로운 걸 도전할 때마다 그러했다. 책을 찾아 산처럼 쌓아놓고 꼭 필요한 자료를 찾을 때까지 밤늦도록 읽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A4용지를 펼쳐놓고 쓰고 또 썼다. PPT로 보기 좋게 만들겠다고 눈이 빠지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씨름했더랬다.    


이번 달 말, 대학 특강을 앞두고 마음에 돌덩이가 툭 떨어졌다. 준비를 차일피일 미룬다. 완벽주의라는 형체도 없는 괴물이 주변을 맴돈다. 그럴수록 시작하는 일이 버겁다. 내가 왜 강의를 한다고 수락했을까? 그 시간에 집에서 글이나 쓸걸. 전에 없던 후회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래도 안다. 결국 2주 뒤, 난 그곳에 가서 2시간 동안 강의를 할 것이고, 학생들 얼굴을 마주하며 묻고 답하고 웃고 환호할 것이다. 그리고, 한 줄 경력이 더해질 것이다. 그 한 줄을 만들려니 지금은 상당히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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