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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Sep 15. 2023

엄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식당 직원이 안내해 준 곳은 독립된 방. 넷이 앉기에 넉넉한 테이블과 정갈하게 놓인 의자 네 개.  여닫이 문을 닫으니 더없이 조용하고 오붓하다. 특별한 날을 위해 남편이 고른 곳, 큰아이의 생일을 위해 선택된 이곳은 무한리필 참치집. 청소년인 두 아이의 식성을 감당하려면 무한리필이어야 한다.


식탁을 풍성히 채운 참치의 붉은 에 아이들 입이 헤벌죽 벌어진다.  "더 많이 가져다 드릴까요?" 우리가 부르는 속도가 빨랐던지 직원은 세 번째 접시를 들고 와서 묻는다. 덩치 큰 남자 셋을 보고 바로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눈치 빠른 그녀의 친절은 우리에게도, 그녀에게도 합리적이다. 다만, 그녀 손에 들린 참치  종류 단조워졌고 붉은 살의 채도는 흐려졌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듯, 아이들의 젓가락은 멈출 줄 모른다. 웬만한 성인 넷보다 많 먹었다.


아이는 하루종일 생일 축하를 받았다고 했다. 축하 메시지가 담긴 롤링 페이퍼에는 반 친구들은 물론 옆 반 친구들, 학교 선생님들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고. 사물함에는 크고 작은 초콜릿과 과자가 놓였고, 카카오톡으로 선물도 쏟아졌단다. "형아, 생각보다 인싸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아이는 꽤 좋았던 눈치다. 넷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마치 친한 친구 넷이 모인 기분이 든다. 오십이 된 친구, 열일곱 살 친구, 열다섯 살 친구,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 언제 우리가 이리 성숙해졌지. 아이들과 밥 먹을 땐 늘 긴장감이 있었다. 언제 물그릇을 엎고,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릴지 모르니까. 밥을 자주 흘리는 큰아이에게 남편은 버럭 성을 냈고, 늦게 밥을 먹는다고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는 자라고, 부모는 나이 들어간다. 늙은 우리가 밥을 흘리고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있었던 일, 앞으로 공부할 계획을 늘어놓는다. 식탁 수다가 제법 있는 편이다. 남편도 재미난지 가만히 듣는다. 이 구성원, 꽤 괜찮은데? 다음에 또 만나서 밥 먹어도 좋겠어. 뒤치다꺼리로만 여겼던 아이들이 대등한 인격체가 됐다는 게 새삼스럽다. 지극히 일상적인 사소한 순간에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니. 녀석들이 어른이 되면 성숙한 인간으로 얼굴을 맞대고 인생을 논하는 재미도 있겠구나. 그런데 아이들이 힘 빠진 우리를 흥미 있는 존재로 여겨야 할 텐데.


 10년 전,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던 내게 마음이 헛헛해진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고, 우리 가족에게 큰 구멍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일을 잠시 내려놓기로 선택했다. 유치원 대신 숲학교를 보내기로 했고, 전세대란이 무서워 서울을 벗어나기로 했다. 공교육에서 대안교육이라는 다른 길로 발을 옮겼고, 작지만 소박한, 결코 그 끝을 알 수 없는 길로 네 식구가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일상은 매 순간 크고 작은 선택으로 이뤄지고 그 선택이 결국 우리를 규정하고 인생을 만든다.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하고 그에 따라 우선순위를 나열한 뒤, 하기로, 때로는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일. 이제껏 살면서 모든 선택과 결정이 현명하고 적절해서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었지만, 2023년 9월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충분히 평안했고 충분히 행복했다.


다음 날 새벽, 눈을 뜨니 책상 위에 무언가 놓였다. 어둠 속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저건, 빗자루인가. 어머나, 꽃다발이다. 보랏빛 리시안셔스와 핑크색 카네이션, 그리고 여린 파란빛의 옥시페탈룸. 그리고 노란 편지. "엄마, 저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녀석을 두고 눈물도 많이 쏟고 소리도 박박 질러댔는데, 엄마 덕분에 이렇게 잘 자랐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런데 뭐가 하나 더 있다. A4 다섯 장의 편지. 아, 본론은 이거다. 엄마, 아빠에게 드리는 'T' 편지. 네가 어떤 말을 하든 우린 너를 신뢰한다(Trust)는 뜻으로 아이의 고민과 부탁을 잔소리 없이 귀기울여주기로 했던 약속.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수면 위로 오르는구나. 녀석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건 단 하나다. 스마트폰, 네버엔딩 스토리. 아하하, 쉽지 않은 녀석. 스마트폰을 사 줄 생각이 없는 부모에게 스마트폰의 필요성을 피력하는 아이. 인생은 또 이렇듯 늘 기대치 않은 선물과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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