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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04. 2023

반에서 유일하게 스마트폰 없는 아들

스마트폰을 갖고 싶다는 장문을 편지를 남긴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색의 변화가 없다. 엄마, 아빠의 반응을 살피는 눈치도 아니고, 빨리 받고 싶다는 무언의 압력도 없다. 


평안한 녀석과 달리, 남편과 나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뒤통수를 맞은 듯, 잠시 심각했다. 10여 년 전, 돌쟁이에게까지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작은 기계를 조막만 한 손으로 요리조리 다루는 모습을 보고 '내 자식은 천재'라며 감탄하던 순간이 내게도 잠시 있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굳은 각오로 아이를 미디어에서 분리시켰다. 뽀로로가 절찬 상영되던 TV를 껐고 게임은 아예 노출하지 않았다. 스마트폰도 물론이었다. 히스테리컬 할 정도로, 무식하고 용감한 엄마가 되기로 했다.


구시대적으로 아이를 키우기로 한 건, 아이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10년 후 도래할 아이의 사춘기를 무탈하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미디어는 결코 착하지만은 않아서, 아이들의 영혼육이 건강하고 균형 있게 자라는 데는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다. 시청률과 조회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으로 만들어진 콘텐츠에 여과 없이 아이가 노출된다는 건 지극히 위험했다. 


시어머니를 위시한 집안 어른들은 이런 나를 종종 나무랐다. "그런 애들이 학교 가서 친구들 휴대폰 뺏어 보면서 더 중독된다. 너무 유난스럽게 애 키우는 거 아니다." 그중에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한 분도 있었다. 어른들의 훈계가 겹겹이 쌓일 때마다 오기의 콧바람이 삐져나왔다. '누가 뭐라든 내 새끼는 내가 키운다. 두고 보라지!' 남편을 내 편으로 만들어가며 아이에게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하기를 17년. 지난여름, 시어머니는 오가는 대화 속에 예상치 못한 말을 남겼다. "요즘 아이들 스마트폰 중독이 보통 심각한 게 아니더라. 에미가 애들한테 스마트폰 안 준 건 아주 잘한 일이다. 잘 키웠어."


그 말을 듣고 어깨 뽕이 올라간 게 불과 한 달 전인데, 아이가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이른 아침 남편이 먼저 두터운 편지를 열었다.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A4 용지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남편의 입에서 웃음이 샜다. 심각한 사안인데, 도대체 편지에 뭐라고 적힌 걸까. 급기야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그는 박장대소를 했다. "여보, 읽어봐. 잘 썼어." "아니, 잘 썼다고 말할 문제가 아니지 않아요?" "그런데 잘 썼어. 누가 글선생 엄마 아들 아니랄까 봐. 아주 논리적이야. 읽어 봐. 게다가 웃겨. 귀엽네, 요 녀석."


아이는 "아주 오래 간직해 왔던, 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제 17살 생일, 고등학교 첫 생일에 마지막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로 서두를 시작했다. 나름 비장했다. 이 편지를 써서 출력하려고 갑자기 안방의 프린터기를 굳이 제 방으로 옮겨갔군. 부모가 강경하니 내색은 못하고, 아이는 오랜 시간 나름의 논리를 구축하고 있었다. 무서운 녀석. 편지 속엔 엄마, 아빠가 그동안 스마트폰을 반대하는 이유 3가지, 자신에게 스마트폰이 필요한 이유 4가지, 만일 스마트폰이 허락된다면 자신이 지킬 약속 3가지가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평소 우리가 아이를 설득하며 했던 낯익은 말들이 아이의 표현을 거쳐 반듯한 문장으로 피어났다. 어른스럽고도 정중하게 활자화된 글 속에는 무언가 너무 갖고 싶은 아이의 욕망이 숨겨져 있었다. 그게 어릿어릿 행간 사이로 보이니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요즘 읽고 있는 책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했다. "제안이나 협상을 할 때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엄마, 아빠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 기회를 주신다면, 저도 동생에게 작은 선물로 PPT 발표 없이 휴대폰을 가지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푸하하하. 남편의 웃음이 입 밖으로 터진 건 이 대목이었다. 큰 아이는 통화와 문자 수신 기능만 있는 지금의 휴대폰을 갖기 위해 3년 전 <휴대폰이 필요한 이유>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때도 아이는 열심히 준비했고 우리는 생일 선물로 '공부폰'을 선물했다. 때문에, 둘째도 휴대폰을 갖기 위해선 그에 걸맞은 준비와 발표를 해야 한다는 게 우리 집 원칙이 됐다. 자신이 스마트폰을 갖기 위해 동생에게 시혜를 베풀겠다는 발상이라니. 우리 아들, 귀엽네. 더불어, 3개월간 실험기간을 두고 자신이 스마트폰을 약속대로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는지 지켜봐 달라고 했다. 이 기간 휴대폰 기계값과 통신 비용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서 자신의 돈으로 한 약속임을 상기하고 신뢰의 연습기간 동안 부모님의 돈이 쓰일 필요도 없어진다고도 강조했다.


아이의 마음도 알겠고, 노력도 가상한데, 그렇다고 바로 "스마트폰, 사줄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대학 갈 때까지 스마트폰을 허하지 않기로 결단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시대에 굳이 트렌드를 거슬러 아이와 힘겨운 논쟁을 지속했는지부터 다시 따져봐야 한다. 아이가 기뻐할 일이라고 부모가 굳게 결심한 일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순 없지 않은가. 남편은 이미 스마트폰 모델을 몇 개 찾아본 눈치다. 아들의 일상을 면밀히 살피며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고 호의적인 발언도 심심치 않게 날린다. 둘이 뭔가 협약을 맺었나. 결국 공은 내게 넘어왔다. '공을 여기서 멈추'게 할 이는 엄마, 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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