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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ug 22. 2023

학원 안 다니는 고1, 중2 여름방학

열일곱 살 아이는 힘겹게 눈을 뜨고 마른 발소리를 내며 일어난다. 발목을 덮는 슬랙스 안에 칼라가 빳빳이 선 셔츠를 넣어 입고, 아빠도 신지 않는 목이 긴 검은 신사양말을 쭉 잡아당긴다. 검은 로퍼 속으로 드러나는 새하얀 발목 양말은 자칫 마이클 잭슨처럼 보일 수 있으니 참아야 한다. 최고 기온 37도. 오늘도 극한의 열기가 온몸을 휘감을 예정이다. 그나마 재킷을 챙기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열일곱살 인턴의 출근길


고등학교 1학년,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 대안학교를 다니는 아이는 해외 대학 진학을 꿈꾼다. 학원은 다니지 않지만, 한국 대학 입시른 방식으로 챙겨야 할 게 많아 여름방학도 쉴 틈이 없다. 학업 성적 뿐만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와 역량을 보여줄 활동도 중요하다. 아이의 이번 여름방학 계획은 이러했다. AP(Advanced Placement, 대학과정 인증시험 및 교과 과정) 2개 과목 수업 다 듣고 기말고사 치기, 대사관 인턴십, 초등학생 영어캠프 봉사, 그리고 미국 수능시험인 SAT 공부하기. 빽빽한 일정을 과연 다 소화할 수 있을지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결론적으로 아이는 모든 걸 끝냈다.


일정이 몰렸던 한 주는 오전에 아이들 영어캠프 교사로, 오후에 대사관 인턴으로 일하고, 저녁에 AP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늦은 밤 기말고사를 치렀다. 인턴십 마지막 날, 재깍재깍 출근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아이는 방 안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두번째 과목 시험을 보는 중이니 문을 열어볼 수도 없다. 어여 끝나야 할 텐데. 행여 늦을까 조바심 나는 마음을 꾹 누르고, 동동거리는 두 발을 꼭 붙이고 소파에 가만 앉아 시계만 바라본다. 어쩌면 어미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이가 제 몫을 해내도록 그저 기다리는 게 아닐까. 그나마 차 안에서 먹을 점심 샌드위치와 김밥을 사다 나르고, 막히는 도로 가운데서 술술 뚫리는 차선으로 재빨리 갈아타 시간 내 도착도록 액셀러레이터를 깊게 밟아준 게 올 여름 나의 최선이었다.


열다섯 살 둘째는 집돌이다. 숨 막히게 후텁지근한 여름, 전기세가 아까운 엄마는 도서관에, 카페에 나가자고 재촉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루틴을 마치고 쉬어야 한다. 중학교 2학년 아이의 루틴은 이러하다. 성경 읽기, 말씀 암송하기, 2학년 2학기 수학 EBS 강의 듣고 문제집 풀기, 토플 공부하기, 영어 단어 외우기, 책 읽기, 아파트 단지 헬스장에 가서 2시간 운동하기. 유일한 낙은 이 모든 할 일을 다 끝내고 EPL 같은 해외축구 영상 시청하기다. 정해진 것 이상은 절대 더 하지 않는 성향인지라 내가 해 줄 일은 '조금 더' 책 읽게 독려하기, 매일 할 일 체크표를 잘하고 있는지 1주일에 한 번 점검하기 정도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모든 걸 집에서 홀로 해결하는 아이의 하루는 길다. 공부를 다 해도 시간이 남는다. 그때 아이는 잔다. 책 읽다 스르르 잠들면 3시간은 넉히 자고 밤에 또 잔다. 우리 집 곰돌이는 열대지방 파충류처럼 '여름잠'을 잔다.


어쩌다, 간만에, 겨우 나갔던 카페에서


"이번 방학은 꽤 알차게 보낸 것 같아요." 더운 여름을 뜨겁게 보낸 열일곱 살 아이는 만족도가 높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가까이 간 것 같아서 좋았어요." 해야 하는 일이 켜켜이 쌓여 압박감이 느껴졌을 법도 한데, 아이는 앓는 소리 한 번 하지 않다. "그냥 하는 거죠. 이겨내야지 별 수 있어요?" 공부도, 활동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게다. 한때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못 가면,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던 적이 있다. 서러운 패배감이 아이 인생에 그늘을 만들지 말아야 할 텐데. 하지만 아이가 온 힘을 다해 애쓰는 모습을 보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설사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친다고 해도, 아이에겐 이 모든 과정이 배움이고 성장이 될 테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중2, 고1 아이들_2023. 8.


다만, 열다섯 살 곰돌이를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있다. 집안에서 어슬렁거리는 녀석과 기껏 "오늘 점심은 뭐 먹어요? 저 다이어트 중인데 뭔가 색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라는 이야기가 도돌이표처럼 돌 때면 더 그렇다. 방학이면 뭔가 특별해야 할 것 같은데  고인 물처럼 정체되는 것 같아서 불안이 쑥 올라오기도 한다. 다른 집 아이들은 여행도 많이 가고, 공부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을 텐데. 그러다가도 2년 전, 큰아이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제 방 안에서 뱅글뱅글 돌던 아이가 2년 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 일을 찾아 해낼 줄 그땐 믿지 못했다. 열다섯 살 곰돌이도 자신의 앞길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찾아낼 거다. 아이는 믿는 만큼 자란다는 말,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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