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Oct 06. 2023

추석 연휴를 망친 그들의 오지랖

어느 자리든 활기찬 언변으로 분위기를 띄우는 이들이 있다. 영상에 오디오가 채워지듯, 현장을 주도하는 건 그들의 목소리다. 그들에겐 주변을 감지하는 고성능 레이저가 장착된 듯, 구석에서 누가 한 말을 용케 듣고 답한다. 건너편에서 하는 말도 즉각 접수한다. 전체 상황을 관찰하고 일 원활하게 진행하는 묘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건 이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건 00이 하면 되겠네요." "모두가 편하려면 물건을 옮기는 게 낫겠어요. 그쪽에서 하시겠어요?"


어느 날, 종종 만나는 누군가의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았다. 자신의 의견도 적극 개진하고 호응도 좋아 분위기를 띄우는데 무엇이 문제일까. 더 나은 방향을 위해 건의도, 제안도 하는데 혼자만 속도가 너무 빠르다. 다른 이들이 생각하고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먼저 입을 열어 치고 나간다. 때로 자신은 엉덩이를 붙인 채 말로만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시키기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자기 고백이 불편함의 근원을 드러냈다. "제가 오지랖이 넓어서요. 아하하."

 

아, 오지랖. 웃옷이나 윗도리에 입는 겉옷의 앞자락을 오지랖이라고 한다. 오지랖이 넓으면 안에 있는 다른 옷을 감싸버릴 수 있단다. 이처럼 무슨 일이나 말이든 앞장서서 간섭하고 참견하고 다니는 사람을 두고 '오지랖이 넓다'라고 말한다. 타인의 마음을 사려 깊게 헤아려 돕고자 하는 의도라면 얼마나 고맙겠는가. 허나, 자신만 옳다는 편협함과 내가 가장 잘났다는 우월감, 오만함, 자기 자랑이 근거라면, 상대는 '배려'가 아닌 '간섭'과 '참견'으로 느낀다. 그럴 때 우린 누군가의 오지랖이 언짢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선이 있다. 서로 선을 지키는 게 관계를 오래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상대가 가깝고 편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우린 통하는 사이', '너와 나는 비슷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견고한 경계선이 흐릿해지고 입술이 가벼워진다. 오지랖이 마냥 편하지 않은 건, 관계를 든든히 받치고 있던 선을 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수 양희은은 친한 사이일수록,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너무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늘 안부가 궁금하지만 아끼는 관계일수록 가끔 연락해서 더 반갑게 만난다고. 사람 사이에도 바람이 통해야 오래간다고. 관계를 아낀다는 그녀의 말이 개운했다.


가족은 그래서 어렵다. 지켜야 할 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남이가'로 모든 변명과 핑계가 합리화되기도 쉽다.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 동안 서로 밀착된 탓이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엄연히 다른 객체인 것을,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가 한마음 한뜻이어야 한다는 걸 은연중에 강요받는다. 추석 같은 명절,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면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구성원들은 비슷하나 다르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번개 맞듯, 찰나에 강렬하게 경험한다. 

 

동생이 결혼하고 처음 맞은 이번 추석이 그러했다. 새 식구를 들인 본가는 유난히 북적거렸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 다른 성 씨를 가진 사람이 함께한다는 건 적당한 긴장과 설렘을 불러왔다. 우린 서로 예의를 지켰다. 처가가 낯설고 불편했을 법도 한데 밝은 표정으로 살뜰하게 대화에 임하는 제부가 고마웠다. 다복하다는 말이 명절 내내 머릿속에 오르내렸다. 마음이 좋았다.


예상치 못한 파란은 이틀 뒤에 찾아왔다. 우리를 만났던 그날 저녁, 제부는 조카들에게 용돈 주는 걸 잊었다며 남편에게 카카오톡으로 송금했다. 뜻밖의 용돈에 아이들은 기뻐했고, 남편은 대신 인사를 전했다. 아이들과 제부가 만난 건 이제껏 네 번에 불과했고,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사춘기 아이들이 완벽한 타인을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데는 어른보다 시간이 필요했다. 동생은 추석 연휴 말미, 느닷없이 내게 카톡을 보냈다.

"용돈을 받고 애들이 인사가 없네." 

제부는 남편에게 용돈을 '쐈고' 남편은 아이들 계좌로 다시 '쐈다'. 어찌하다 매개가 된 남편은 아이들 인사도 제부에게 분명 전했는데 갑자기 동생은 뭘 바랐던 것일까.

 

아이들에게 제부의 연락처를 알려준 후, 전화하게 했다. 아이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모부'라고 부르는 것조차 어색한 아이들 얼굴은 난감함, 그 자체였다. 두 녀석은 미리 감사 인사를 연습한 후, 오그라드는 몸을 어쩔 줄 몰라하며 전화를 걸었다.

"내 덕분에 언니가 애들 교육 잘 시킨 부모가 됐어. 남편도 놀라서 얼굴이 빨개졌어. 그래도 굉장히 좋아하네ㅋㅋㅋ" 

곧바로 날아든 동생의 카톡에 속이 부대꼈다. 한동안 잠잠하더니 다시 시작인가. 그녀는 자주 이러했다. 예측을 넘어 알 수 없는 방향에서 훅 치고 들어다.


아직은 서로 낯설기만 한 제부와 남편, 아이들은 충분히 선을 지키고 배려하고 있었다. 분명 제부는 조카들의 인사를 바라고 용돈을 건네지 않았을 게다. 피를 나눈 동생은 언니를 ‘교육시켜’ 처조카들에게 '첫 용돈'을 준 남편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던 걸까. 갑자기 1시간 전, 내게 전화 걸어 아이들이 용돈 받은 사실을 확인한 엄마가 떠올랐다. 제부와 우리의 관계는 천천히 자연스럽게 예열되고 있는데 동생과 엄마는 무엇이 염려스러웠던 것일까. 그들의 전화와 카톡은 우리를 배려한 것일까, 간섭하고 참견한 것일까. 그날 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핸드폰을 뒤집 받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전업주부와 워킹맘이 상극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