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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24. 2023

더없이 좋은 오랜 친구, 미도리 상

미도리 상은 고등학교 친구다. 일본을 너무 좋아해서 대학, 대학원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지금은 일본어를 가르친다. 일본 대학 입시 전문이다. 여고 시절, 월드컵 한-일전이 열렸던 날, 우리가 '대한민국'을 응원할 때 그녀는 홀로 '울트라 닛폰'이 돼서 친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일본이 골을 넣으면 우리는 안타까워 탄성을 질렀고 그녀는 두 손 들고 환호했다. 우리나라가 점수를 내면 책상을 두드리며 소리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그녀는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들이 뭐라 하든 굴하지 않는 그녀의 일본 사랑은 애절하고 순수해서 우리는 그녀를 미워할 순 없었다. 그녀는 다른 과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일본어 시간에만 눈빛을 반짝였고 일본어만 주야장천 공부했으며 일본어 선생님을 짝사랑했다. 우리는 그녀를 본명 대신 일본 이름 '미도리'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3학년, 그녀는 내 짝꿍이었다. 우린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늦은 밤 둘이 걸었다. 1분 1초가 아쉬운 고3이었지만 하굣길만큼은 30분 넘게 천천히 걸으면서 내내 수다를 떨었다. 빠르게 걷는 나와 달리 미도리상은 어느 때고 느릿느릿 팔자로 걸었다. 절대 뛰는 법이 없었다. 미도리상의 속도를 맞추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해서도 헤어지지 않고 우린 한참을 더 떠들었다. "그래, 00야. 맞아..." 미도리 상은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공감해 주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거두절미하고 팩트 폭격을 날렸다.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그녀가 참 좋았다. 우린 각기 다른 대학에 들어가서도 자주 만났다. 남자친구가 생기고 결혼하게 됐을 때, 가장 먼저 인사시킨 것도 미도리 상과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한 시간도 있었다. 우린 결혼과 출산 시기가 달랐다. 결혼 후 임신, 출산, 육아가 이어지면 '엄마'가 된 이의 사생활은 사라지고 아이의 사생활만 남는다. 내가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혼을 쏙 뺄 때 미도리 상은 목하 열애 중이었다. 반대로 미도리 상은 나보다 늦게 결혼해 더 늦게 아이를 낳았다. 공교롭게 결혼 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서로의 라이프 사이클이 다르니 연락할 겨를도 없었다. 얼굴을 다시 보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 전부터다. 5~6년 만에 다시 본 내 친구는 살이 올랐지만 여전했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으니 잊고 있던 나 자신이 소환됐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조차 그녀는 모두 기억해 냈다. 오랜만에 만나 한참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던 날,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내 안에 넘쳤다. 무슨 말을 해도 있는 그대로 다 받아주는 내 친구는 안전하고 편안했다. 일로 만난 사이처럼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아이들로 만난 사이처럼 조심하지 않아도 되었다. 평소 다른 이에게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이 그녀 앞에선 무장해제됐다. 너무 좋으면 헤벌죽 웃다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던 그녀는 오랜만에 나를 만나서도 변함없었다.


미도리 상과 자주 연락하고 만나지 않는다. 몇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서로 마음에 품고 있다가 생각나면 격의 없이 카톡을 보내고 뜬금없이 전화한다. 늘 서로를 위해 기도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얼마 전 만난 미도리 상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00야, 그거 이제 그만 잊어. 마음에서 내려놔." 오랫동안 전전긍긍하던 내 고민을 아는 그녀의 한 마디가 훅 들어왔다. 이번에도 팩트 충만. 그리 바라고 기다렸던 일을 포기하라고 누군가 그랬다면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게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서운하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우린 꼭 안고 헤어졌다. 그녀와는 한두 달쯤 후 다시 만날 게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도, 갑자기 카톡이 날아와도 하나 이상하지 않다. 나보다 더 나를 헤아려주는 친구. "우리는 1박 2일을 해도 시간이 모자라." 암만. 일주일 같이 있어도 부족할 거다. 7일 동안 이야기가 자동 재생산되어 더 많은 수다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미도리 상, 우리 일본 가자. 그녀의 딸이 아직 어려서 가능할지 모르지만 난 늘 일본 전문가 미도리 상과 일본 여행 가는 꿈을 꾼다. 마음이 풍성한 그녀를 위해 여행경비를 조금씩 모아볼 참이다. 그녀 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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