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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ct 11. 2020

두려워하거나, 달라지거나

무기력했던 일상에 도둑처럼 찾아온...

냉장고가 비었다.     

평소 애써도 안 되던 ‘냉파’(냉장고 파먹기)가 며칠 사이 절로 되었다. 아주 오래전 담아놓은 듯한 장아찌, 여러 겹 밀봉된 굴비, 잘 볶아진 고추장은 썰렁한 식탁에서 빛을 발했다. 너무 곱게 쟁여둔 덕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던 수많은 야채와 반찬들은 꼬릿한 냄새를 풍기며 쓰레기통으로 향해야 했다. 의도치 않게 냉장고 정리가 됐다. 살림 고수들의 냉장고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내 눈에 이만하면 아름답다.


십 년째 구식 일반 냉장고를 쓴다. 양문형도, 4도어형도 아니다. 수납공간이 현저히 좁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니 여유가 생겼다. 지극히 현실적인 나의 냉장고.


내친김에 주방 수납장을 뒤졌다. 여기저기 쟁여놨던 먹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했던 컵라면, 파스타 소스, 통조림. 실로 오랜만에 본다. 유통기한이 한참 전에 지났다. 내가 이런 걸 샀었구나. 가계부 식료품비 항목의 숫자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 깝. 지. 만... 어쩌랴, 버려야지. 음식물 쓰레기가 5㎏이 넘는다.

 

집이 깨끗해졌다.  

먼지 털기, 청소기 돌리기, 그리고 걸레질. 세상 하기 싫어하던 물걸레질을 일주일 사이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물걸레 청소기를 돌렸다. 성에 안 찬다. 소독수를 집안 바닥 구석구석 뿌린 후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조아려 가며 손걸레질을 했다. 새까맣게 묻어 나오는 먼지에 대한 부끄러움도 내 몫이요, 매끈해진 바닥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뿌듯함과 개운함도 내 몫이다.     


습식으로 쓰는 메인 화장실은 비누칠하고 샤워기로 물을 뿌려 후딱 청소를 끝냈다. 반건식인 안방 화장실은 간단치 않다. 샤워부스의 찌든 때는 뜨거운 물로 불리고 세제 거품 풍성히 내 얼룩 하나 없이 닦아냈다. 세면대와 변기는 바닥에 물이 튈세라 조심조심 닦고 마른 천으로 마무리. 내 눈을 피해 굴러다니던 바닥 먼지도 말끔히 없앴다. 이쯤이면 호텔 화장실이다. 하우스키퍼로 일해볼까.      


wannabe home


새로 채워 넣기 바빴던 냉장고를 뒤져 살뜰히 집밥을 해 먹고, 매일 거하던 집을 매의 눈으로 돌아보며 쓸고 닦고 정리정돈을 한다. 너저분했던 공간에 여백이 생기고 상쾌함마저 인다. 누군가는 매일 하는,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물론 그런 분들도 계시겠지. 하지만 난 아니었으니까. 


맛있는 게 갑자기 당기거나 밥하기 귀찮으면 외식을 했다. 언젠가 다시 어질러지는 집은 상황과 날씨에 따라, 무엇보다 기분에 따라 ‘대청소’로 몰아두고 하루 ‘빡세게’ 치우면 됐다. 집안일은 내게 해야 하긴 하나 덜 중요한 일이었다. 귀찮아서, 급하지 않으니까, 언제 날 잡아서, ‘다음에!’로 자주 미뤄두는 일. 마음 한 구석 켜켜이 쌓여 곰삭은 숙제 같아 빨리 해치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되지 않던 일. 




돌아보면, 반복적인 집안일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고됐다. 평소 하는 것 이상으로 더 쓸고 닦는 건 힘에 부쳤다. 딱 익숙한 만큼 편했고, 에너지를 새롭게 얹어야 한다면 별 일 아니어도 망설여졌다. 일단 엉덩이 붙이고 앉으면 다시 일어나는데 열두 번은 더 마음을 고쳐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내게 필요한 건, 스피~드!'를 읊조리다가도 나태와 무기력함에 사로잡혀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았더랬다. 달라지고 싶어도, 움직이고 싶어도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 벽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할 때면 좌절감과 자책만 남았다. 


그랬던 내가, 매일 삼시 세끼를 차려내고 시곗바늘처럼 집안을 돌고 또 돈다. 모터 단 듯 빠릿빠릿 움직이는 손발이 진정 내 것이란 말인가. 어색하지만 이 기분, 꽤 괜찮다. 온몸에 매달려 있던 돌덩어리가 훅 떨어져 나간 가붓함이랄까.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무엇이 어렵다고.


관성의 법칙. 
뉴턴의 제1 운동 법칙.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자기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정지한 물체는 영원히 정지한 채로 있으려 하고 운동하던 물체는 같은 속도로 직선운동을 지속하려고 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늘 하던 일은 그대로 유지되려 한다. 어제 했던 루틴을 오늘 계속하는 건 그래서 어렵지 않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새롭게 시도하려면 동력이 필요하다. 멈춰 선 공을 굴리기 위해 힘이 가해져야 하듯, 익숙함을 넘고 귀차니즘을 이겨내려면 그보다 큰 에너지가 주어져야 한다. 


코로나 19. 극히 작은 바이러스가 어이없게도 내게는 동력이 됐다. 전 세계를 패닉에 빠뜨린 초강력 전염병 정도는 되어야 내 안에 변화가 일어나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크고 센 적은 자기 자신이라더니, 도대체 내 안의 벽은 얼마나 크고 견고했던 걸까. 


두려웠던 게다. 바이러스로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내가 확진자가 되면 아이들은 누가 돌보나. 아이들도 감염되면 생이별인데, 불쌍한 내 새끼들 그러다가... 본능적인 모성애가 꿈틀거리자 손발이 움직였다. 내가 달라져야 했다. 지금까지 안일하게 살아온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무탈하게 살아온 게 한편으로는 감사했지만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인생에 경고등이 들어온 기분이랄까.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다가 어느 순간 바람결에 날아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다.




일과 살림, 육아를 병행하며 쫓기듯 살았었다. 자랑스러운 워킹맘, 멋진 슈퍼우먼 따윈 허상이었다. 어쭙잖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니 아이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일을 내려놓고 아이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구멍 났던 시간을 메우듯 오로지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가르치는데 골몰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스스로 제 일을 할 만큼 자랐다. 비로소 몸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여유로워졌고 동시에 나른해졌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삶을 잠시 잊고 살았던 것일까. 불현듯 따뜻한 물속의 개구리가 떠올랐다. 뜨거운 물에 넣을 땐 펄쩍 뛰어오르지만 차츰 물의 온도를 높이면 그저 편하게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다는 개구리. 위기의식 따위 없이 서서히 익어가 생명을 다하는 개구리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타인의 삶을 보며 동경하기만 할 뿐, 스스로는 작은 변화조차 시도해보지 않으려 했던 나태함이 일상을 지배했다. 순간의 고통이 버거워 ‘그저 여기가 좋사오니...’라며 지금의 불행을 합리화했던 건 아닐까. 편한 게 행복한 것이라고, 잘못된 자족을 평안으로 등치하며 이 정도면 족하다고, 더 이상은 힘겨우니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안위하면서 말이다. 


누군가 그랬다. 성장은 한계에 도달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고. 변화와 성장에 대한 성찰과 강한 추진력, 굳건한 의지가 있었다면 구태의연한 관성에 젖어 일상이 무기력해지진 않았을 게다. 도전과 노력, 성취, 자신감이 선순환하며 어릴 때부터 상상해 온 바로 그 '어른스러운' 삶이 펼쳐졌겠지.

         

(travelweek.ca)


새 봄을 예상했었다. 있을 법한 크고 작은 변화가 기대됐었다. 주변 환경은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서 달라질 것이고 그에 맞춰 적절히 적응하면 될 일이었다. 모든 게 멈춰 서서 이제껏 겪지 않았던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는 건 올해 계획에 없었다. 내 안의 변화가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것도. 


코로나 19는 원치 않는 도둑처럼 찾아왔다. 내 삶에 깊이 파고들어 모든 것을 앗아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살고 싶었다. 갑자기 치솟은 생존의 욕구는 초점 없이 바깥을 향해 있던 내 시선을 내면으로 돌려놨다. 그리고 물었다. 난 이제껏 무엇을 하고 살았는가,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


내 안에 멈춰있던 공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공을 가두고 있던 단단한 벽 일부에 작은 틈이 생긴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가만히 앉아 머릿속으로 계산만 하던 완벽주의자의 답답한 습성이 온전히 깨지고 부서지려면 오랜 시간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늦은 걸까', '왜 진작 못 했을까'라는 후회가 스멀스멀 밀려들려 하지만, 거기까지. 

지금이 내 삶의 변화를 위한 가장 빠른 시간이라 믿는다. 이 순간을 놓치면 며칠은 더 나이 들어 버릴 테니까. 주저하고 망설이는 건 이제 그만하련다. 귀찮을수록, 하기 싫을수록 딱 한 발만 내딛는 거다.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작은 실행이 쌓이면 조금 더 크고 버거운 일들을 시작할 힘이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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