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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n 28. 2024

세 남자는 이미 작당했다

"나한테 갑자기 가라고?"

남동생의 제안은 달콤했다. 호텔 제공, 투어 예약, 일정 세팅 완료. "누나 비행기 티켓만 끊으면 돼." 업무에 지쳐 돌연 휴가를 낸 동생은 가까운 해외, 일본 여행을 계획했다. 목표는 일단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가기. "혼자 가도 상관없는데 누군가 같이 가도 좋을 것 같아서 주변에 물어봤더니 다 안 된대. 간만에 선심 쓰려고 했구먼." 5월 황금연휴가 끝나고 6월 현충일이 등장하기 전은 한창 학교 가고 회사 가고 돈 벌어야 할 때다. 마음은 원이로되 현실은 해야 할 일들이 널려있, 지극히 의무적인 일상.

  

친구,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까지 두루두루 수소문하다 남동생은 여행 메이트 자리에 가족을 차례대로 넣었다.

-일흔여섯 살 아버지: 위암 수술로 위 절제 후 식사 시간 엄수, 식사량 매우 적음, 격한 활동시 매우 피곤함.

-일흔두 살 엄마: 놀러 다니는 걸 심히 좋아하나 몇 해 전 다리 수술해서 장시간 걷는 것 힘듦.

-둘째 누나: 출근해야 함.

-둘째 매형: 역시 출근.

"이제 누나 식구들만 남았어."

     

그 말을 남편이 낚아챘다. "당신, 처남이랑 가면 되겠다." "누구? 나? 여권 만료된 지 옛날이에요. 아이들 학교도 데려다줘야 하고." 훅 들어온 남편의 말에 난 연이어 읊조렸다. "말도 안 돼. 지금 무슨 여행이라고. 말도 안 돼." 학기 중에 바쁜 고등학생, 중학생 아이들을 두고 엄마가 놀러 간다니. "애들은 엄마 없어도 괜찮을걸? 어쩌면 더 좋아할지도 몰라. 누나 정규직 아니니까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이거 왜 이래. 나도 바빠. 원고 써야 해."


여행이라면 나 말고 남편이 가야 했다. 이른 새벽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50대 가장에게 필요한 건 휴식. 지난해부터 대학 진학을 앞두고 쉼 없이 달려온 큰아이도 있었다. 카드 광고에도 있지 않았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떠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여행의 자격을 논하자니, 난 아니었다. 쉼이 필요한 만큼 죽으라고 뛴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일한 것도 아니었다. 버겁지 않을 만큼 글을 썼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 틈틈이 놀았다. 주말이면 피곤해 꼬꾸라지는 남편과 코피 쏟아가며 공부하는 아들에게 미안할 만큼 난 '워라밸'에서 라이프를 우선순위에 두고 적절히 살았다. "당신이 왜 자격이 없어. 그동안 애들 이만큼 키우면서 일하느라 얼마나 애썼어. 글 쓰랴, 강의하랴, 코칭하랴, 겉으로 잠잠한 척해도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 다 알아. 우리 삼부자는 이미 이야기 끝냈어. 엄마 삿포로 보내기 프로젝트!"      


전날 밤, 남편은 아이들을 불러놓고 가족회의를 했단다. 아빠는 엄마를 삿포로에 보내기로 했다. 엄마가 안 갈 게 분명하니까 명분이 있어야 한다. 생각해 봤는데 생일 선물을 미리 준다고 하면 엄마가 갈 것 같다. 아빠는 이번 엄마 생일 선물로 비행기표를 끊어주려고 한다. 너희도 엄마 여비를 조금 보태는 게 어떠냐. 학교는 버스 타고 갈 수 있지 않냐...두 아이들은 찬성했고 얼마를 갹출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이어서 둘째가 이렇게 말했단다. "근데 아빠, 엄마는 실물이 중요한데 우리가 여행 때 용돈 드린 걸 엄마가 까먹고 생일날 뭔가 물건을 안 드린다고 삐지면 어떻게 해요?" "걱정하지 마. 그건 아빠가 미리 방어해 줄게. 엄마도 이번엔 왜 선물 없냐고 그러지 않으실 거야."


아니, 이 사람들이 날 뭘로 보고. 어이없어 반박할 말을 찾는 내게 남편은 틈을 주지 않고 덧붙였다. "당신에겐 한 마디 매듭짓고 다음으로 나아갈 때야. 다녀와. 다녀오면 글도 잘 써지고 새롭게 일할 마음도 생길 거야." 내 속을 훤히 읽고 있는 남편, 결국 글쓰기로 날 유혹하는구나. 글이 잘 써질 거라는 말에 마음이 1cm 움직였다. 남편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신 콧바람 쐬는 거 좋아하잖아. 갔다 오면 글발이 살아날 거야. 갔다 와서 열심히 일하면 되지."

     

비엔나소시지처럼 식솔을 대동하고 가는 가족여행도 아니고, 빡세게 일해야 하는 출장도 아니고, 어디를 갈까 고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여행 일정은 동생이 다 짰고 항공권 예약은 남편이 해 줄 것이다. 이처럼 매력적인 여행 제안이 있을까. "좋아, 그렇다면 기꺼이 가겠어요!"라고 답하자니 심란했다. 가서 잘 쉴 수 있을까. 세 남자가 나를 위해 애쓴 만큼 충분히 누려야 할 텐데. 괜히 어설프게 콧바람만 들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힘들면, 바람에 흩날린 먼지가 부유하듯 내 마음에 쓸데없는 달뜸이 지속되면 어쩌지.


모든 걸 내던지고 떠나는 기회비용을 따지기 시작했다. 고작 3박 4일 여행을 두고 한 달짜리 산티아고 순례길 버금가는 고민이 이어졌다. "갈 거지?" "아, 기다려봐요. 아직 결정 안 했다니까." 머뭇거리는 내게 남편 역시 노랫가락처럼 읊어댔다. "삿포로 갔다 오면 글도 잘 써질 거야. 지금 가면 얼마나 좋겠어. 바람도 선선하고 저 멀리 산꼭대기에 하얀 눈이 쌓여 있고. 입에서 살살 녹는 오마카세도 먹고, 홋카이도 유제품이 그렇게 맛있다네? 갔다 와서 열심히 일하면 되지. 삿포로... 아, 좋겠다 삿포로..." 어찌 됐던 삿포로, 기승전, '삿포로'.


수년 전, 남편에게 서프라이즈 여행을 선물한 일이 있다. 엄청난 업무량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조금 모아둔 '비자금'을 털어 부산의 특급호텔을 예약했다. 남편이 출근한 사이, 며칠에 걸쳐 몰래 옷가지를 쌌다. 이틀 휴가를 내어 근교로 같이 바람 쐬고 오자는 그를 말없이 태우고 기차역에 내려줬다. "가서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쉬고 와요." 그때의 감동을 그는 여전히 기억하고 이따금 곱씹곤 했다. "나도 당신한테 그런 여행을 선물하고 싶었어. 다녀와요. 여기 걱정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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