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드물게 하는 일에는 종종 걱정, 근심이 들러붙는다.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낯섦이 주는 불안.
6년 만에 비행기를 타자니 출국 며칠 전부터 명치 끝이 간질간질했다. 행여 롤러코스터급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추락하면 어쩌나. 마지막 순간, 사람들은 가족에게 '사랑한다' 말한다는데 핸드폰이 비행기모드여서 실시간 연락이 힘들면...? 수많은 생각 끝에 집 정리정돈을 하기로 했다. 혹여나, 내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인천에서 일본 삿포로까지 비행시간은 고작 2시간 30분. 비행기 사고가 발생할 확률은 약 0.000025%. 조선시대 아낙이 비행기를 타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수백 편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시대에 웬 구시대적인 두려움이란 말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걱정을 토로하는 내게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이 사람이 비행기 처음 타는 것도 아니면서. 그건 알지? 비행기 탈 때 신발 벗어야 하는 거?"
삿포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가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행기는 무탈하게 삿포로에 도착했고 워터슬라이드를 탄 듯 활주로에 매끄럽게 닿았다. 꼭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와우, 기장님 최고. 이토록 완벽한 착륙이라니! 꽉 말아쥔 손을 펴 손뼉 치고 싶은 걸 참았다.
신치토세 공항에서 JR 쾌속열차를 타고 삿포로 역으로 향했다. 모양은 익숙하나 절대 해석할 수 없는 일본어 간판.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일본어였지만, 이제는 일본어를 안다고 말하기 부끄럽다. 오직 시험을 위한 벼락치기 공부였을 뿐, 쓰지 않은 언어는 알뜰하게 망각된다. 간간이 병기된 한글이 몹시나 반갑다. 그러고 보니 동생과 난 말수가 줄고 행동이 느려졌다. 까막눈이 되어버린 탓일 게다.
당연히 있을 법한 것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여기가 낯선 곳이라는 걸 깨닫는다. 삿포로역에 도착하니 계단 옆에 있어야 할 에스컬레이터가 보이지 않는다. 작지만 묵직한 캐리어를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계단 끝을 헤아린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경제 선진국이라는 일본은 곳곳이 여전히 아날로그적이다. 빠른 변화와 발전에 익숙한 한국인은 이제 여행 첫날임을, 아직 숙소에도 도착하지 않았음을 상기한다.
삿포로 역은 교통과 쇼핑 중심지구다. 홋카이도의 모든 철도가 이곳을 통한다. 10개에 달하는 플랫폼, 다이마루 백화점과 스텔라 플레이스, JR 타워 호텔 닛코 삿포로로 연결된 통로를 헤집고 역을 빠져나온다. 하늘이 파랗다. 아, 비로소 삿포로다.
삿포로역 근방
얼굴에 닿는 바람이 맑고 개운하다. 여긴 미세먼지 걱정이 없겠구나. 삿포로를 처음으로 감각한 건, 깨끗한 공기였다. 뽀도독 세수하고 나온 아이 얼굴 같은, 말간 공기. 홋카이도의 산해진미와 관광명소보다 더 감탄스러웠던 그 공기. 햇볕 아래 바짝 말린 이불처럼 사각사각 감싸던 바람이 질투 날 정도로 좋았다.
노면전차 안에서 바라본 삿포로 저녁 거리
첫날 유일한 일정은 모이와 산 전망대. 삿포로 야경을 보기 위해 노면전차를 타고 1시간 가까이 달려갔다. 산 아래 이르자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삿포로 야경 명소로 TV타워, JR타워, 노리아 관람차도 있지만 동생은 거두절미하고 이곳만 가면 된다고 했다. 삿포로에서 가장 높은 곳, 홋카이도 대자연과 삿포로 도심이 조화로운 곳, 일본인이 뽑은 '일본 신3대 야경' 중 2위로 선정됐다는 그곳.
모이와 산 전망대 입구
전망대는 500미터가 넘는 모이와 산 정상에 있다. 로프웨이를 탄 후,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어두운 산 그림자 속으로 얼마쯤 갔을까. 한순간 두 눈 가득 빛이 쏟아진다. 아, 적막과 어둠 너머 삿포로 구석구석 크리스마스 전구를 촘촘히 깔아놓은 듯, 도시 전체가 고요히 반짝인다.
모이와 산 전망대
오렌지빛 영롱한 저곳은 삿포로 행정구역상 어디쯤이려나. 수많은 불빛 속에 삿포로 사람들이 하나씩 숨어있을 것만 같다. 삿포로의 이방인은 불현듯 삿포로 사람들의 일상이 궁금해진다. 낯선 이곳에 닿느라 설레고 긴장했던 나처럼 특별한 하루를 보낸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일하느라 바쁜 이들도, 일과를 무사히 끝내고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 식사를 나누는 이들도.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세 남자도 지금쯤 저녁을 먹고 있겠구나.
귓등을 때리는 바람이 매섭다. 추위를 피해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눈에 박히는 빛에 사로잡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만히 '불멍'에 빠지게 만드는 빛. 화려한 빛의 향연을 이루는 작고 미약한 빛들이 지나온 나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날의 오전 10시, 어느 날의 오후 4시 20분. 사소한 일상을 채우던 볼품없는 시간, 무료하고 무심한 듯 흘러간 시간, 갈 길 몰라 헤매던 시간이 모여 지금 난 어쩌다, 삿포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