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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05. 2024

여행 준비? 이번엔 패스!

계획 없는 여행의 마력

MBTI 유형 중 'J'는 소위 계획적 인간을 말한다. 상황을 맞닥뜨리면 어떻게 대처할지 판단하고 그에 맞게 계획을 세우는 유형. 이들은 무엇이든 목적의식을 갖고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과정 자체보다 결과가 중요해서 계획에 따라 '끝'을 봐야 만족스럽다. 목표로 삼은 걸 '제때' 이뤄낼 때 자존감도 높아진. MBTI를 신봉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상황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데 있어 임기응변보다 계획을 선호하니 내가 'J'인 건 맞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미리 준비할 때 오는 정서적 안정은 삶을 평안케 한다. 적어도 나 같은 성향의 인간에게는 그렇다. 계획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손발이 움직인다. 그렇지 않으면 종종 회로 끊긴 로봇이 되는 기분이다. 때문에 집 밖을 나서기 전, 현관 앞에서 우물쭈물거리는 일이 잦다. 함께하는 자는 답답하겠지만 계획하는 자는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아이고, 밖에 한 번 나가기 어렵다. 하여간 미적거리기는...." 면박을 들어도 어쩔 수 없다. 하물며 여행은 오죽하겠는가.


반드시 가야 할 곳, 봐야 할 것, 맛집 리스트, 예상 비용이 대충이라도 손에 잡혀야 한다. 만일에 대비해 플랜 B도 세운다. 여행은 응당 준비하는 만큼 성공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야 본전도 뽑고 여행하는 동안 행복하다. 계획대로 딱딱 깔끔하게 떨어지는 기쁨! 물론 여행은 갑자기, 휙, 떠나는 묘미가 있다지만, 누군가 내게 이런 여행을 제안한다면 그 자리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려갈 게다. 아.... 그게... 저... 그렇게 가면... 안 되지 않을까요? 그 귀한 시간, 큰돈을 들여서 가는데 계획 없이 무작정 간다? 그건 아닙니다. 그럼 다 못 볼 텐데요. 두고두고 아쉬우면 어떻게 해요. 돈도 아깝잖아요.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애초부터 내 계획이 아니었다. 갑자기 동생의 일정에 얹힌 자는 양심을 지켜야 한다. "누나 뭐 하고 싶어?"라고 동생이 거듭 물었지만 내 대답은 동일했다. "난 계획 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잘 따라 댕길게." 여행 메이트를 배려하는 동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취향이 확고하고 계획이 철저한 큰누나의 성향을. 하지만 적어도 이번 여행을 대하는 태도이자 유일한 계획이라면 동생의 원 계획을 방해하지 않고 충실한 여행 메이트 되기, 그뿐이었다.

   

여행 준비는 여행 기간장소를 결정하는 데 시작한다. 여행의 물리적 여건을 좌우하는 건 허락된 시간과 돈이다. 마음껏 플렉스하고 싶은 ‘욕망’과 여행 후 돌아올 일상이 있다는 ‘현실’ 사이에서 우리의 고민은 저울추처럼 오간다. '까짓 거, 질러 봐?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여길 가겠어.' vs. '인생은 투 비 컨티뉴드야. 여행 갔다가 안 돌아올 거야? 다시 일하고 돈 벌어야지.' 이번 여행 이미 정해진 터라 내게 선택지가 없다. 골치 아프게 항공권 및 호텔 예약 사이트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다. 선택의 자유는 사라졌지만 마음은 가붓하다. 때로 타의적 결정은 아름다운 법이다.


"이제 슬슬 짐을 좀 싸지? 가서 뭐 할지도 보고." 나보다 더한 파워 'J'인 남편은 항공권을 확정한 후에 신이 나서 자주 말했다. "아뇨. 이번엔 기꺼이 수동적 여행자가 되겠어요." 의지적으로 눈을 막고 귀를 닫았다. 사실 여행할 지역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짐 싸는 일도 결정된다. 날씨는 어떠한지, 가서 무엇을 할지에 따라 현지에서 입을 옷을 고를 수 있다. 활동성과 사진발까지 생각하면 경우의 수는 복잡해진다. 옷가지 하나하나 필요와 욕구를 따져가며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이걸로 할까 저걸로 할까, 고민의 늪에 빠지면 선택을 여행지로 미룬다. 안 가져와서 후회하느니 그냥 넉넉히 챙겨가자. 혹시 모르니까 긴 티셔츠 두 개 더 가져가고, 부담 없이 입으려면 검은색이 낫겠고, 사진 잘 받게 화사한 핑크 티셔츠도 하나 가져가고, 신발도 매일 같은 걸 신을 순 없으니까... 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가방 부피와 무게는 정해져 있다. 떤 걸 넣고 뺄지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정서적 만족이냐, 신체적 편안이냐. 짐 싸느라 하루가 다 간다.

     

삿포로는 우리 동네보다 4~5도 기온이 낮아서 서늘하다고 했다. 춥지만 않으면 된다. 누군가에게 멋져 보일 이유도 없고 인생사진 건질 욕심도 없다. 그저 예기치 않은 여행이니, 쉽게 가자.(참고로 동생은 매우 헐렁하게, 발 닫는 대로 움직이는 'P' 형 인간이다) 욕심을 버리고 하루에 한 벌씩 입을 옷을 정했다. 추우면 겹쳐 입고 깨끗하면 다음 날 또 입고, 삿포로 가는 날 입은 옷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다시 입기. 떠나는 곳도, 돌아올 곳도 결국 여기, 지금 이곳. 그 사이 날씨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리는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부피가 작은 옷, 그래도 여행지니까 색깔 쨍한 옷 한 벌 정도만 더 챙기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기내용 여행 캐리어가 얼추 채워졌다. 몸에 지닐 배낭엔 여권과 지갑, 에세이 한 권, 블루투스 키보드를 넣었다. 짐 챙기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역대 최단 시간. 짐이 많으면 힘들다. 감당하지 못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다니다 기운 빠진다. 손에 든 것이 많아 정신없으면 물건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여행 가방 싸는 게 이리 가뿐한 일이었다니!               


나의 기내용 캐리어


일본으로 떠나는 날 새벽, 살뜰하게 짐을 챙긴 나를 보고 동생이 말했다. "누나, 정말 쇼핑할 마음이 없구나." 쇼핑? 일본 갈 계획도 없었는데 뭘 살지는 생각했겠니. 손바닥만 한 공간 없이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짐을 넣은 나를 칭찬했다. 휘리릭 가방 쌀 줄도 아는구나, 숨겨진 능력을 발견하곤 내심 기뻤다. 다만 지극히 콤팩트한 가방이 며칠 후 후회스러워질 줄, 그땐 몰랐다.



인천공항 가는 길 @인천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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