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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02. 2024

여보, 내 여권 만료됐어

여권도 없는데 무슨

물 건너가려면 여권이 있어야 한다. 여권이 어딨더라.


지난 몇 년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 집에선 '해외여행'이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가 옛 일이 됐지만 눈앞의 일상을 살아내는 게 급했다. 남편은 관리자가 돼 자기 팀을 본격적으로 꾸렸다. 꼰대들과 MZ들 사이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새롭게 일을 시작한 난 '디지털 노마드'여서 어디든 움직일 수 있었다. 노트북을 들고 따사로운 햇살 아래 선베드에 누워 낭만적으로 일할 자유. 하지만 듣기 좋아 '디지털 노마드'이지 여행 가서도 일을 놓지 못하는 극한 노동자. 굳이 이국적인 풍경 아래 설렘을 꾹 누르고 노트북에 코 박고 있기는 아까웠다. 아이들은 바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학기 중엔 학기 중이어서, 방학 땐 방학이어서 쉬지 못했다. 여러모로 여행이 우선순위 밖으로 밀린 우리 집에서 여권은 아무도 찾지 않은 퇴물이 됐고 그 사이 여권이 유효하다는 10년이 야금야금 사라졌다.


'그동안 놀면서 여권이라도 만들어두지'라는 말을 남편은 애써 감추고 있었다. 대신 그는 직설적이고 명료하게 말했다. "여권 사진부터 촬영하자. 그래야 내일 바로 구청에 가서 여권 신청을 하지." 주말 오후, 비가 거셌다. 만사가 귀찮았다. 어차피 여행 갈 생각이 없는데 더없는 핑계다. "비 오는 날 누가 사진을 찍어요. 사진 잘 안 나와. 게다가 일요일엔 사진관도 쉬어..." 곁에 앉은 남편은 말이 없었다. 대신 카톡이 울렸다. '현재 영업 중인 사진관임' "너무 비싸요. 내일 대형마트 문 열면 거기 가서 할게요. 거긴 반값이에요." 남편은 답하지 않았다. 다시 카톡. 처음 공유한 곳보다 오천 원이 쌌다. 남편 등쌀에 밀려 집을 나섰다. 그날 머리도 안 감았고 화장도 안 했다는 설명은 의미가 없었다. "여권 사진 누가 본다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인 게 제일 좋은 거야. 여권만 나오면 돼. 빨리. 그니까 어서 나가." 나 역시 사진 촬영을 위해 머리를 감고 메이크업을 얹을 마음은 없었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나갔다. 사진 촬영은 3분 만에 끝났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실물보다 훨씬 예쁘게 사진이 잘 나와야 한다는 바람이 없으니 사진 찍는 게 대수롭지 않았다. '본판 불변의 법칙'에 따라 외국인들에게 그저 '나'처럼 보이면 된다. 사진관 사장은 날 불러 곁에 앉혔다. 그의 화려한 손놀림으로 눈이 커지고 얼굴과 어깨 대칭이 잡히고 피부가 뽀얘졌다. "아, 그만하셔도 되어요." 그를 멈춰 세웠다. 포토샵이 기본인 시대라지만 내가 봐도 내가 아닌, 인위적인 그녀가 내 여권에 있는 건 반갑지 않다. 공항 출입국 직원이 나를 노려보며 '그녀'가 '나'인지 식별하느라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는 건 개인적, 국가적 낭비다. 몇 컷 되지 않는 사진 촬영하느라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더니 이미 피곤했다. 비가 더 거세지기 전에 얼른 집에 가고 싶었다.

   

"난 충분히 애썼어요. 여권 늦게 나오면 못 가는 거예요. 그 이후에는 아쉬워하지 말기." 사진 촬영비도 예상치 않은 지출인데 비행기 티켓에다 여행 경비까지. 아, 아득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내게 꼭 긴급여권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에게 가성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여권이 나와야 비행기표를 확정하고 숙소를 업그레이드할 테니. (그는 이미 남동생과 이야기를 마치고 기존 여권번호로 항공권을 예약한 상태였다. 남편, 숨겨둔 비자금이 많은가?)


다음 날 오전 9시, 구청 근무 시간에 맞춰 일찍이 주차장에 도착한 '1등 민원인'은 긴급여권 만드는 법을 속사포로 물었다. 그건 구청이 아닌 시청에서 가능하단다. 일이 긴급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선 예약한 비행기 티켓이 있어야 했다. 긴급여권과 10년짜리 복수 여권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같다. 다시 말해 10년간 수십 번 쓸 수 있는 여권이냐, 단 한 번만 쓰고 버릴 여권이냐를 선택해야 한다. 물론 긴급여권은 이날 당장 발급된다. "여행이 이번 주말이라고 하셨죠? 여권은 3일이면 나올 거예요. 그냥 10년짜리로 만드셔도 괜찮을 듯해요." 구청 직원의 만류에 복수 여권을 신청했다. 이제는 하늘의 뜻. 여권이 일주일 사이 안 나오면? 난 어제처럼, 오늘처럼 지내면 된다. 돈도 굳는다.

 


여권 도착


살다 보면 알게 되는 여러 가지 중 하나는 일이 되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날 위해 발 벗고 나선 듯, 크고 작은 모든 일이 가능한 방향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여권은 신뢰 가득한 공무원의 말처럼 사흘 만에 나왔다. 구청 직원의 컴퓨터를 통해 여권 발급 접수가 되자 외교부에서 친히 카톡을 보내줬다. 한국조폐공사에선 바로 여권 제작에 들어갔다. 이틀 뒤, 집배원 아저씨는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 방문 시간을 알려주며 집에 있으라고 당부했다. 글 쓰겠다고 카페에 나온 나는 내심 반가움을 누르고 차분히, 하지만 후다닥 손을 놀렸다. 집에 도착할 즈음, 다시 울리는 전화. 부지런한 집배원 아저씨는 어느새 집 앞이다. 대한민국 만세.


남편은 비행기 티켓을 확정했고, 동생은 모든 일정에 큰누나를 넣었다. 마침 매주 여는 글쓰기 모임을 멤버들의 건의 및 동의로 그 주엔 쉬기로 한 터였다. 곧 다가올 시아버지 생신도 온 가족 의견에 따라 주말에 미리 당겨 축하하기로 했다(물론, 내 여행을 시댁 식구들에게 굳이 알리진 않았다). 두 아이들은 1시간 30분에 달하는 등하교를 위해 대중교통 노선을 파악했고, 남편은 휴가를 냈다. 말이 휴가지, 그는 집안일을 챙기고 아이들 밥을 준비하며 재택근무를 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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