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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12. 2024

제발, 돈키호테는 그만 가자

동생님은 쇼핑이 전부라 하셨어

여행 계획자인 남동생에게 모든 걸 맡겼지만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 동생의 여행 스타일과 취향. 성인이 된 후, 우리가 함께 여행 간 일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


"누나, 호텔 가기 전에 저기 잠깐 들르자."

동생은 삿포로역에 도착하자마자 맞은편 도큐백화점을 가리켰다. 이번 여행에서 입을 바지를 사야 한다고 했다. 그건 미리 챙겨 오는 게 아닌가. 의아했지만 묵묵히 인솔자를 따랐다. 이제 시작이니까. 처음부터 불편함을 드러내 서로 힘들면 손해다. 편하자고 선택한 여행사 패키지도 100% 만족스러울 순 없. 우린 캐리어를 달달 끌고 백화점 7층까지 갔다. 이미 골라둔 바지가 있어 입어보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났다. 배고프고 목이 말랐다.


삿포로역 맞은편 도큐백화점


첫날 일정인 모이와 산 전망대는 야경을 위한 곳이었다. 해가 지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누나, 여기서 15분만 걸으면 돼. 거기 들렀다가 전망대로 가자." '거기'는 요즘 핫하다는 옷가게 두 곳. 덕분에 첫날 난 2만 1781보를 걷고 헬스 애플리케이션에서 칭찬 배지를 받았다. '또 하나의 한계를 돌파했네요. 오늘 15킬로미터를 걸었어요!' 동생이 다리 아픈 엄마를 모시고 오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불길했다. 설마, 나흘 내내 쇼핑만 하는 거 아니야? 동생이 얼기설기 짜놓은 일정을 다시 들여다봤다. '쇼핑'이라 쓴 곳에 '!'가 붙어있었다. 다른 일정에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느낌표. 난 동생의 계획에 얹힌 자다. 나의 정체성을 되뇌었다. 아기자기한 먹거리, 생활용품을 사는 재미로 일본 당일 여행도 한다고 하지 않던가. 조용히 마음을 다잡는 내게 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누나, 엔화가 싸서 쇼핑 잘만 하면 항공권 본전은 뽑는." 아뿔싸.

    

동생의 본격적인 쇼핑은 둘째 날부터 만개했다. 삿포로 스스키노역 근처엔 '메가 돈키호테'가 있다. 삿포로 여행객이라면 반드시 들려야 하는 최대 규모의 쇼핑 스폿. 지하 2층부터 4층까지 식료품, 약품, 가전제품까지 세상 모든 물건이 있을 것만 같은 곳. 24시간 영업하는 무서운 곳. 그는 둘째 날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물건을 샀고, 이날 미처 사지 못한 선물을 사기 위해 셋째 날 돈키호테를 또 들렀다.


스스키노역 근처


본디 쇼핑을 싫어하지 않으나, 딱히 뭔가 살 계획이 없었으며, 이미 소소한 먹거리로 구매 만족도를 채운 난 점점 피로감이 쌓여갔다. 마치 백화점에서 아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언제 끝나? 이만하면 구경 다 하지 않았어? 더 살 게 남았어?"라고 질문하며 '나 힘듦. 지루함. 집에 가고 싶음'을 드러내는 세상의 남편들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누나 살 거 없어?"

"없어."

"옷 안 봐?"

"안 봐. 그만 가자."

"나 사고 싶은 티셔츠랑 가방이 있어. 그것만 찾아보고." 


끙,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휙 뒤돌아 가는 동생의 뒷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쟤가 원래 저리 물건 사는 걸 좋아했나. 만날 시커먼 옷만 입고 다니는 것 같았는데 언제 옷에 관심이 많았대. 무슨 친구 그토록 많아서 또 선물을 사러 가. 내가 아는 동생이 맞나.

      

내 나이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는 남동생을 낳았다. 큰며느리로서 장손을 낳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탄 엄마가 서른아홉의 나이에 이뤄낸 역작이었다(당시 이 나이에 셋째를 출산한 건 완전 노산이었다). 동생이 나오기 전날, 엄마는 밤새 진통으로 신음했고 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좌불안석,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현관문을 벌컥 열고 물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또 여동생이야." 난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농담인 걸 알았을 때 더 크게 울었다.

   

남동생의 존재는 우리 집의 기쁨이었다. 난 어린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줬고 목욕을 시켰다. 우유를 타주면서 분유 두세 숟가락을 듬뿍 퍼서 엄마 몰래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입안에 퍼지는 고소한 우유 맛이 좋았다. 엄마의 오랜 시름과 아픔이 사라졌다는 게 더 좋았다.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막둥이는 6살 어린이였다. 입시에 매달리기 시작한 그때 이후로 그 아이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 학원에서 태권도를 배우는지 피아노를 배우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난 대학에 들어갔고 취업했고 결혼했고 두 아이를 낳았다. 그사이 동생은 둘째와 남매로 지냈고, 몇 년 후엔 나이 많은 부모님의 외아들처럼 지냈다.

  

열한 살이나 차이나는 누나를, 공부 안 한다고 혼내고 방 지저분하다고 잔소리만 했을 큰누나를 기꺼이 여행에 불러준 동생의 마음이 궁금했다. 내가 동생을 따라나선 건 그래도 우리가 닮은 꼴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성년이 된 동생에게 과거 그랬던 것처럼 여행지에서까지 싫은 소리를 쏟아내고 싶진 않았다. 나 역시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남편과 두 아들을 두고 왔고, 일에 지쳐 권태와 번아웃으로부터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왔지만, 쇼핑을 즐기는 동생에게 불만을 토로할 순 없었다. 동생과 나는 다를 뿐, 그 아이 나름대로 여행을 즐기고 있는 거니까.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갈라지기로 했다. 동생은 분명 ‘넷째 날, 쇼핑이 어려울 수 있음'이라고 했으나 대형 쇼핑몰인 삿포로 팩토리에 들르길 원했다. 난 일본을 떠나기 마지막 시간까지 복잡한 쇼핑몰에서 물건 구경하느라 혼을 빼고 싶지 않았다. 동생과 만날 시간을 약속한 후, 호텔 근처 작은 카페로 향했다. 각자 시간을 만끽한 후, 우린 다시 만났다.


동생은 2만 보 넘게 걸어가서 산 티셔츠 두 장을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건넸다. 엄마가 공들여 사 온 편의점 간식에 심드렁하던 아이들은 외삼촌이 사준 스투시 티셔츠에 열광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속으로 구시렁거렸건만, 말없이 조카 선물 챙기는 삼촌이라니. 고맙다, 동생. 다음에는 힘든 내색 안 할게. 그런데, 여행갈 때 날 또 불러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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