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 샌드위치를 동생과 반 갈라 먹고 오후 2시가 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끼니때가 지났는데 밥을 먹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20여 년간 여행에서 배를 곯아가며 돌아다닌 적이 있었던가. 정오 즈음, 식당 대신 백화점 의류매장 한복판에 서 있는 생경한 풍경.
보통 우리 가족의 여행 목적지는 첫째도 맛집, 둘째도 맛집, 셋째도 맛집이다. 이를테면 아침식사는 생선구이, 점심 먹기 전 순대국밥, 점심은 냉면, 오후 간식은 김밥과 떡볶이, 저녁 만찬은 회 정식. 관광명소는 식사를 중심으로 사이사이 유연하게 넣어준다. 여기서 '유연하게'는 식사시간이 늦어진다거나, 가고자 하는 식당에서 멀리 있는 곳이라면 쿨하게 제끼는 걸 의미한다. 여행은 보고 느끼는 게 있어야지 하루에 다섯 끼가 웬 말이냐며, 제발 배 고플 때 식당에 가자고 남편에게 투덜거렸던 일이 아련하게 스친다. 남편,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게 생겼소. 당장 카톡을 열고 불만을 토로하고 싶은 걸 꾹 누른다.
홋카이도는 대자연 속에서 수확한 싱싱한 제철 식재료가 넘치는 곳이라 했다. 야채와 고기, 생선, 유제품 등 질 좋은 재료가 많아 일본 미식 여행으로 손꼽히는 곳. 삿포로의 대표음식 '수프카레'를 찾아 나선다. 호텔 근처에 수프카레로 유명한 '스아게' 발견.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대기가 길다. 다른 곳을 찾아 발을 옮길 기운도 없다. 번역기를 돌려 메뉴를 먼저 고르고 순서를 기다린다. 1시간 조금 못 되어 자리를 안내받자 드디어 등장한 수프카레.
수프카레
국물이 묽다. 어릴 적 엄마가 친구들과 여행 가기 전 냄비 하나 가득 끓여둔 걸쭉한 오뚜기 카레와 다르다. 카레인데 수프같이 국물이 또르르 떨어지니 '수프', '카레'가 맞다. 하나하나 별도로 손질한 재료를 따로 조리하고 수프도 따로 끓인 후 그릇에 담아낸다. 가게마다 개성 강한 조리법을 자랑한다던데 이곳엔 카레 국물에 빠지기 쉬운 재료를 꼬치로 엮어 넣었다. 황송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든다. 8시간 만에 영접하는, 이번 여행의 첫 음식. 제대로 먹어야 한다. 가만, 밥을 말아야 하나, 수프를 밥에 끼얹어서 먹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일단 커다란 닭꼬치를 입에 넣는다. 흐응. 콧바람이 훅 나온다. 알감자는 고구마와 밤을 먹는 듯 다디달다. 큼직하게 썬 야채가 이리도 감칠맛이 있었던가. 치즈 얹은 밥에 야채와 고기를 올려 찹찹, 뜨끈한 국물도 호로록. 싹싹 긁어먹고 나니 허기가 풍성하게 채워진다. 흠, 마음에 들었어, 삿포로!
낯설고 독특한 음식을 접하고 눈이 번쩍 뜨일 때, 비싸서 생일 때나 먹는 메뉴가 여행지에서 놀랄만한 가성비를 자랑할 때 식도락의 기쁨은 솟구친다. 카이센동을 앞에 두고 절로 차오르는 마음은 후자다. 도톰하게 썰어 소복이 얹은 회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회가 많아서 어찌할 바 모르는 행복한 고민. 밥과 조화롭게 먹는 최선의 방법을 고심하다 회를 간장에 찍는다. 밥 먹고 회 먹고, 회 먹고 밥 먹고. 생선 육수에 밥을 말아 한 입 먹으니 눈이 감긴다. 밥을 적게 시켰는데 배가 불러 결국 다 못 먹고 남겼다. 회로 배를 채웠다.
카이센동
삿포로 근교, 오타루에 가면 꼭 먹자고 다짐한 게 있었다. 바로 오마카세. 한국에서 먹성 좋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오마카세를 먹는 건, 한 달 식비를 기꺼이 바치겠다는 자세여야 가능하다. 일본 여행에 못 이기는 척 슬며시 손을 얹은 것도 일본에서 먹고 싶은 몇 가지가 있어서였는데 그중 하나가 오마카세였다. 오타루는 '미스터 초밥왕'의 배경이 됐던 곳. 동생은 가성비 좋은 스시집을 찾았다. 예약하지 않아 부리나케 달려간다. 딱 2자리 남았다. 1시간 만에 먹고 일어날 수 있냐는 사장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3분 뒤 이어 들어온 한국 관광객, 자리가 없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다. 남의 안타까움을 목도하자 나의 자그마한 행복이 크게 부풀어 오른다. 미안해요.
셰프는 한국말에 무척 능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었다. 맛은? 말해 뭐 하나. 입에서 녹는다. 자꾸자꾸 없어진다. 신박한 표현을 선사하고 싶지만, 뇌가 일하기 전에 스시는 입에서 부드럽게 사라진다. 그 유명한 홋카이도 우니까지. 알차게 스시 12개를 먹고 흐뭇하게 가게를 나온다.
오마카세
남편이 꼭 먹어보라고 추천한 메뉴 중에 양고기가 있었다. 징기스칸. 몽골 냄새 폴폴 나는 이름의 연유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양고기 하면 떠오르는 몽골, 몽골 하면 징기스칸이라는 말, 불판이 몽골 투구 모양 같아서 붙은 이름이라는 말. 어찌 됐든 면직물 생산용 양 사육이 주요 산업이었던 홋카이도에서 넘치는 양고기를 소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다.
언덕처럼 봉긋 솟은 동그란 불판에 숙주와 양배추, 양파를 가장자리에 두르고 꼭대기에 비계를 올려준다. 그리고 양고기 한 점, 두 점. 흘러내린 육즙과 기름, 채소와 어우러진다. 맛도 고소해, 누린내도 안 나, 씹히는 느낌이 부드러워서 좋다. 잡내 걱정 없는 양고기의 새로운 세상. 다만 화력 좋은 화롯불 덕에 언제 튈지 모르는 기름, 샤워 수준의 어마어마한 연기는 감내해야 한다. 지글지글 음향효과와 기름진 향, 입안 가득 고기와 야채의 조합은 지금 생각해도 침이 꼴깍 넘어간다.
맛있는 음식을 보니 가족 생각이 피어오른다. 많이 먹는다고, 자주 먹는다고 '이 식충이들!'이라 자주 타박당했던 나의 세 남자. 음식을 나눠 먹고 즐기는 일은 기쁨 그 자체였던 것을.
첫날 밥때를 놓친 누나가 발끈한 걸 본 동생은 그 후, 먹는 일에 전념을 다했다. 발길 닿는 대로 대략 봐서 좋아 보이면 문을 휙 열고 들어가던 자는, 같은 값이면 별점 높은 곳,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주로 찾는 곳, 깨끗하고 동선 효율적인 곳을 따지는 자 앞에서 사흘 내내 열심히 구글맵을 켜고 연구를 했다. 좋아, 그 자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