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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19. 2024

꽃밭에 꽃이 없다

비수기 여행의 유익

삿포로가 홋카이도의 중심이지만 홋카이도에 삿포로만 있는 건 아니다. 홋카이도면적만 한반도의 80%에 달한다. 너른 땅에 펼쳐진 소도시에도 삶이 존재한다. '홋카이도=삿포로'라고 생각하는 건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삿포로만 봐도 시간은 부족할 터였다.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명소를 둘러보고, 동네책방에 가서 책 구경도 해야 한다. 걷다 보면 매력적인 골목길도 있을 거고, 현지인만 간다는 카페와 빵집도 분명 눈에 띌 터였다. "삿포로만 봐도 충분하지, 삿포로 외곽까지 볼 일 있나, 굳이 시골 구경을 해야겠어?" 종알거리는 내 옆에서 동생이 버스 투어를 예약했다. 고층건물에 갇혀 컴퓨터 화면만 보느라 찌든 자신에게 자연을 선물해야겠다며 내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기 전에 모든 걸 끝낸다.


버스 투어는 홋카이도 중심인 '비에이'와 '후라노'를 둘러보는 코스다. 일본어가 유창한 한국인 가이드가 홋카이도 정보를 줄줄 쏟아놓는다. "홋카이도의 성수기는 6월 말부터 8월까지입니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지만 장마가 없고 습하지 않아 일본인들에게도 인기 높은 피서지죠. 다만, 아직 꽃은 다 피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많이 본 사진 같은 풍경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삿포로 외에 다른 도시는 들어본 적도 없는지라 SNS 속 끝내주는 풍경 사진도 그때까지 보질 못했다. 꽃 좀 덜 피면 어떠한가. 삿포로를 벗어나 비에이로 달리는 길만으로도 기대 이상이다. 버스 투어를 예약한 동생에게 크게 반발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싱그러운 초록빛 들판을 향해 찰칵, 코발트빛 하늘 속 몽실한 구름이 사라질세라 또 찰칵, 핸드폰을 내려놓질 못한다. 


삿포로에서 비에이로 가는 길


몇 해 전부터 렌즈를 착용하고 외출하면 눈이 뻑뻑해서 두통이 잦았다. 노화에 따른 안구건조증이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삿포로에 온 이후로 눈이 메마르지 않는다. 아무래도 공기 탓이었을까. 눈도 마음도 시원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하다. 그들은 이토록 고운 자연을 충분히 누리고 살려나. 목가적인 풍경에 감탄할 때마다 누군가는 꼭 이렇게 말했다. "막상 살면 따분해서 며칠 못 갈 걸? 이 사람들은 도시를 부러워할 지도 몰라." 내 손에 없는데 남이 가지면 더 좋아 보이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문제는 겉으로 쉬이 드러나지 않으니 고민 많은 내 인생보다 타인의 것이 나아 보일 수 있다. 삿포로 외곽 고속도로를 달리는 나의 시선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당신들은 참 좋겠소.


첫 도착지는 사계채의 언덕. 이곳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다. '형형색색의 꽃밭 카펫. 아주 길고 커다란 색색의 카펫을 깔아 둔 듯 경이로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 7ha 부지의 거대한 꽃밭이다. 스스로를 ‘비에이 대표 엔터테인먼트 가든’이라고 소개할 만큼.... 여름에는 샐비어, 패랭이, 튤립, 양귀비, 작약, 금잔화, 맨드라미, 해바라기 등이 만발하는 모습이 장관이다.'(출처: 디스 이즈 홋카이도)


출처: 일본정부관광국 홈페이지


하지만 6월 초는 아직 핫 시즌이 시작하기 전. 비수기 끝물에 찾은 홋카이도는 아직 나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됐다. 알록달록 꽃 카펫 대신 앙증맞게 맺힌 꽃봉오리. 후라노의 라벤더 농장 '팜토미타'에도 만개하지 않은 꽃들 사이로 듬성듬성 흙바닥이 보였다. 라벤더 꽃이 개화하는 시기는 7월 중순에서 하순까지 고작 2주. 고로 나는 상상한다. 맑고 파란 여름 하늘, 하얀 뭉게구름, 환한 햇살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보랏빛 꽃밭. 지금이 그 때라고.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사계채 언덕


그나마 조금 자태를 드러낸 꽃 옆에서 어쭙잖게 포즈를 취한다. 눈에 걸리는 것 없이 저 멀리 지평선이 이어지는 것만으로도 좋다. 프레임 안에 시원한 풍경과 나만 존재한다. 극성수기에는 꽃밭을 배경 삼아 '나'만의 독사진을 찍는 게 사치라고, 가이드는 위로하듯 말했다. 총천연색 아웃도어룩을 입은 이들이 사진 속에 점처럼 우두두 박힌다고.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사계채 언덕


돌아보면, 늘 나의 여행은 비수기에 이뤄졌다. 스물 갓 넘은 해, 추석 연휴가 끝나고 사람들이 직장과 학교로 복귀하던 날, 홀로 해남에 내려갔다. 윤선도 유적지를 유유자적 거닐다가 차편이 없어 히치하이킹을 했고, 달마산 중턱에 엉덩이 깔고 앉아 하늘을 보다가 미황사에서 읍내로 내려가는 스님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학생, 여자 혼자 여기서 이러면 못 써." 나라고 가장 아름다운 시절,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직접 눈에 담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는가. 다만 화려함보다 호젓함이 좋아서 찬찬히 둘러보면서 여유를 누리는 것을 택한다. 인파에 떠밀려 소음과 불친절 속에 여행이 얼룩지는 것보다 조금 덜 보고 더 사색하는 게 낫다.

 

그래도 한켠에 피어있던 꽃들


꽃이 상록수도 아니고 저마다 피는 때가 있는 법. 늘상 피어있어 언제고 여행객의 눈이 호강하면 좋겠지만 꽃마다 만개 시기는 다르다. 어쩌면 나도 지금 온전히 피어나지 않은 채 봉오리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때때로 삶은 단순함과 정적만으로 이루어져 있을 때도 있다'는 말처럼 군말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게 전부인 시간.


라벤더는 흐드러지지 않았지만 코 끝에는 향이 묻는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큰데 잘 되지 않는다고, 남들 보기에도 내가 하는 일이 항상 승승장구, 탄탄대로, 꽃길 같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아 가끔 의기소침해진다고 토로할 때마다 남편은 그리 말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야. 아무것도 되지 않아 보일 때도, 마냥 쉴 때도 있어야 꽃 필 때가 오는 거지." 

'이미' 활짝 핀 꽃보다 '아직' 피지 않은 꽃이 희망적이다. 내 인생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아서, 언제 올지 모를 그때를 바라며 애쓰고 견디는 게 필요할 뿐.


팜토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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