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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23. 2024

그럴 거면 오타루엔 왜 갔니

오타루는 운하, 오르골당은 손수건!

오타루. 입을 열고 조곤조곤 부르게 되는, 이름마저 감성적인 도시. 은은한 가스등이 내려앉는 낭만적인 운하, 영화 <러브레터>에서 여주인공이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던 하얀 눈밭. 어렴풋한 기억의 조각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곳.


오전 8시 출근시간, 삿포로역에서 북새통을 뚫고 정신없이 JR쾌속열차를 탔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열차는 방향이 중요하다. 누가 봐도 여행객인 걸 알아챌 만큼 연신 두리번거리며 오타루행이 맞는지 확인하는데 동생이 속삭인다. "이따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일 거야."


사 가고 학교 가는, 건조한 표정의 사람들이 내리고 열차 안엔 적막이 돈다. 다행히 오른쪽 창가에 자리가 났다. 언제 바다가 나오려나 자꾸 등을 돌려 뒤를 본다. 오밀조밀 건물이 모두 스쳐 지나가자 거짓말처럼 쑥 나타난 바다. 기찻길 하나를 두고 해안선이 지척이다. 정동진 열차를 탄 것 같다. 같은 색 물감을 쓴 듯, 무척이나 닮은 바다 빛과 하늘빛. 수평선이 반듯하다. 어쩌면 오타루는 가는 길마저 이토록 로맨틱할까.


오타루 가는 길


지방 중소도시에서 나고 자란 터라 어릴 적 서울에 와서 지하철을 타는 건 큰 이벤트였다. 3호선 옥수역, 4호선 동작역에서 갑자기 지상세계가 펼쳐지면서 한강이 나타날 땐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과서에서 봤던 '한강의 기적', TV뉴스에서나 봤던 그 한강을 눈으로 직접 목격. 참을 수 없는 탄성이 촌스럽게도 툭 튀어나왔다. "오, 한강이다!"  그 옛날 단발머리 소녀처럼 지금 난 나지막이 외친다, '오, 바다다!'


미나미오타루 역


미나미오타루역에 내렸다. "치즈케이크를 먹고 오르골 구경을 하려면 여기서 내리는 게 좋댔어." 자그맣고 오래된 역, 평범한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살 것 같은 동네. 여행객의 발걸음이 그들의 이른 아침을 방해할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 천천히 걷다 보니 5개의 길이 모이는 교차로에 유럽풍의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르타오'. 오타루를 거꾸로 발음하면 같아지는 유명 제과 브랜드의 본점이자 카페다. 아직 오픈 전,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사람마다 행복감을 불러오는 고유한 포인트가 있기 마련이다. 내 행복 버튼을 누르는 건 단연 하늘과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오붓한 고요함이다. 네 박자가 완벽히 맞아떨어진 곳에서 황홀하게 눈을 감는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맑고 경쾌한 오르골 음계. 뒤이어 들리는 퓌, 퓌, 증기 시곗소리. 이곳이 진정 오타루로구나. 수줍은 도시가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다. 광장 한가운데서 꿈꾸는 것 같다.


르타오(좌), 오르골당 증기시계(우)


건너편 오랜 건물은 '오르골당'. 오르골당에 가면 적어도 세 번 놀란다. 2층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규모에 놀라고, 세상에 이렇게 많은 종류의 오르골이 있다는 데 놀라고, 가격이 '겁나' 비싸다는 데 놀란다. 동생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가 나오는 오르골을 찾아 나선다. 많은 이들이 오르골에 코를 박고 한참 들여다본 후 가만히 내려놓는다. "세상에 뭐가 이리 비싸..." 아쉬워하는 그들 곁을 난 휘적휘적 지나간다. 정성껏 태엽을 감으면서 오르골을 즐길 마음이 없으니 이제 이곳을 나가겠노라.


그런 내 발목을 잡은 게 있었으니 바로 손수건. 오르골당 증기시계가 곱게 수 놓였다. 단아하니 예쁘다. 770엔. 오르골값에 비하면 소소하다. 남색 바탕에 흰색과 초록색 줄이 얌전히 들어간 손수건은 남편 것, 분홍 줄무늬는 내 것. 가만히 있자, 남색과 갈색, 흰색 체크가 조화로운 손수건도 마음에 든다. 살까 말까, 손수건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여러 번. 오르골당에서 손수건에 마음을 뺏길 줄이야. 


오르골당에서 산 손수건


개인위생을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에선 남녀노소 모두 손수건을 애용한단다. 한참을 고민하다 손수건 세 장을 집어 들었다. 문득 우리나라 공중화장실에서 핸드티슈를 두 장 써서 모르는 이에게 면박을 들었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1장이면 충분합니다'라는데 실제 가당한 건지 당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지가 펄펄 끓는 위중한 시기에 티슈 두 장 쓰는 사람은 상식 없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 '1장'이니 '2장'이니 할 것 없이 각자 손수건을 갖고 다니면 깔끔하게 해결될 문제이거늘, 왜 우린 손수건 쓸 생각은 하지 않을까.


오르골당에서 나와 기분 좋게 오마카세를 먹고 다시 삿포로로 향한다. "오타루가 딱 요만큼이야? 작네, 엄청" 손수건을 흐뭇하게 쥐고 만지작거리며 동생에게 말한다. "근데 누나, 우리 운하를 안 봤다. 이제 생각났네." 아니, 어떻게, 그게 이제... 나 역시 손수건을 매만지다가, 스누피가 그려진 또 다른 손수건을 사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오타루를 떠나오고 말았다. 동생이 지닌 강력한 쇼핑의 기운이 이제 나에게 넘어오고 있는 것인가.


'오타루면 무조건 생각나는 운하!'라는데 운하는 생각조차 못하고 교차로 주변만 맴맴 돌다 오다니. 그러고도 오타루를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다녀온 곳은 르타오와 오르골당, 스시집일 뿐, 아무 생각 없이 동생 뒤만 졸졸 쫓아다니느라 오타루는 반도 못 봤다. 여기까지 와서 못 하고 못 본 게 왜 이리 많노. 삿포로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난 말을 잃고 말았다. 홋카이도에 머물고 있는데,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자꾸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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