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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26. 2024

일본이 좋은데 이를 어째

그 많은 한국인은 왜 일본을

소곤소곤, 살 것 같다. 만석인 스타벅스도, 1시간 기다려 앉은 식당도 시끄럽지 않다. 모국어가 없는 자리, 언어가 낯설면 청각도 너그러워지는 걸까.


삿포로는 조용했다. 열차와 버스 안, '띠리링'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도, 핸드폰 안으로 목청껏 쏟아내는 수다도 없었다. 일행끼리는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왁자지껄한 우리네와 다른 풍경. 여기는 나의 공간이지만 당신의 공간이기도 하니 존중해 줄게요,라고 말하는 듯, 공공장소는 여럿이(公) 함께(共) 자리하는(場) 곳(所)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듯, 소곤소곤 소곤소곤. 부지불식간에 귀를 파고드는 소음이 없어지자 긴장했던 어깨가 내려갔다. 그동안 혹사당한 고막이 편안해졌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고 하지만 나라마다 분명 다른 게 있다. 비에이-후라노 가는 날, 투어 버스는 삿포로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는 명단을 확인한 후, 우리를 버스로 안내했다. 그는 빙 돌아, 횡단보도를 건너, 다시 온 방향을 거슬러 걸었다. 버스는 가이드를 만났던 자리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몇 걸음이면 되는 길을 그는 '보도'를 따라 돌아 돌아 갔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곳이 한국이었다면, 난 최소한의 동선으로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하기 위해 보도 아래로 내려가 주차장을 가로질러 갔을 터였다. 평소 하던 대로, 지나가는 차를 요리조리 피해서.


모이와 산 전망대에서 삿포로 시내로 돌아가려면 노면 전차를 타야 했다. 정거장은 성인 한 사람이 서 있을 정도로 폭이 좁았다. 한적한 정거장, 나와 동생은 한가운데 섰다. 잠시 후 우리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정거장 앞에 공간이 있었지만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먼저 선 순서대로, 그들은 우리를 기준 삼았고 줄은 정거장 보도를 넘어설 듯 이어졌다. 우린 정거장 앞쪽으로 당겨 섰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한 걸음, 두 걸음 따라 움직였다. 식당에서도, 전망대에서도 그들은 줄을 섰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 일본인들에겐 줄 서는 게 당연하고 중요해 보였다.

     

그들은 제멋대로 규칙을 변형하고 임의로 만들지 않았다. 급하다고 새치기하지 않았고, '이 정도쯤이야' 하며 큰소리 내지 않았다. 길은 횡단보도에서 건넜고, 사람이 있으면 차는 무조건 정차했다. 지하철에서 배낭을 뒤로 메고 있다가도 사람들이 타면 앞으로 고쳐 멨다. 대중목욕탕인 대욕장에선 개인 수건을 머리 위에 얹었다. 탕 밖으로 나오면 바닥이 흥건해지지 않도록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았다.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건 자신을 보호하는 일이자 타인을 위한 배려였다.


다른 나라를 여행한다는 건 적잖은 노력이 필요하다. 잠시 머물다 떠날 여행자여서 내키는 대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할 수도 있지만, 여자의 에티켓을 지킬 때 누리는 즐거움이 있다. 그곳의 문화와 관습을 알면 여행의 깊이도 달라진다. 게다가 여행자는 나라, 인종, 나이, 성별 등에 따라 의도치 않게 일반화되곤 한다. 세상 모든 한국인을 경험할 수 없기에 각자 경험한 한두 사람을 한국인 전체로 인식하기 쉽다. 누군가에겐 '나=한국인'이 된다는 걸 깨달은 후로 난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면 세련되고 사려 깊은 '코리안'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주인은 집에 놀러 온 손님을 환대하고 손님은 '객'으로서 기대되는 매너를 지키듯, 나 역시 성숙한 인격체로서 여행자가 지켜야 할 선을 지키고 싶었다.

 

오타루 가는 열차 안에서 낭만에 취해 있을 때, 동생이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 잘못은 무슨. 우리도 이들처럼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구먼. 혹시 자꾸 뒤돌아 바다 풍경을 바라보는 게 실. 례. 인. 가...? 열차에 내리자 동생이 말한다. "아까 옆자리 아줌마가 자꾸 우리를 쳐다봐서 왜 그런가 했더니 우리 앉았던 주황색 자리가 노약자석이었어. 일본 사람들은 예의 밖 행동을 하면 쳐다본대." 아, 그렇군.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일본에 사는 친구가 그러네. 얼마 전엔 지하철 안에서 한국인 커플이 삼각김밥을 먹는 걸 보고 놀랐다고. 여기에선 눈총 받을 일이래."


비에이의 작은 카페에도 한국인의 흔적은 있었다. 마음을 홀랑 뺏길 만큼 운치 있던 카페는 화장실마저 물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구석구석 세심하게 관리하는 손길이 놀라웠다. 거울 앞에 붙은 메모에 눈이 꽂혔다. '고객에의 부탁. 손을 씻은 후 대야의 물을 빼십시오. 종이 타월로 닦으십시오. 대야 밖으로 물을 흘리지 마십시오' 한국어로 또박또박 적힌 문장.


비에이의 작은 카페 화장실


일본은 조용하고 정갈하고 친절했다. 물론 요즘 MZ세대는 과거보다 그런 성향이 덜하고 '혐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짢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다행히도 내가 삿포로에 머무는 동안 얼굴을 붉히거나 마음 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여행은 좋았다. 그들의 진심까지 알 수 없으나 서비스 정신에 근거해 낯선 이들을 대하는 그들의 미소가 '객'의 마음을 기분 좋게 했다. 많은 이들이 일본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일본 괜찮네, 다시 오고 싶을 만큼 좋군. 하지만 일본이 좋다,라고 툭 말하기엔 차원이 다른 편치 못함이 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처럼 호불호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함.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저렴해진 엔화 덕에 보고 먹고 쇼핑하는 재미가 좋아서 한 번 다녀온 후 어렵지 않게 두 번, 세 번 가는 곳. 올들어 6월까지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4명 중 1명이 한국인이라는데, 모두 444만 명이 방문해 외국인 여행객 1위라는데 일본을 향한 그들의 속내는 어떠하려나. 마냥 싫은 곳을 내 돈 내고 거듭 갈 리는 없고 그들은 일본이 그저 좋을까. 역사적 앙금과 국민적 인식, 개개인의 여행은 별개인 걸까.


비에이 카페의 주인 내외는 밝은 미소로 우리를 환대했다. 30분도 채 머물지 못했지만 동생과 난 이번 여행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그 카페를 꼽는다. 일본어가 가능했다면 정성껏 내려준 커피에 감사를 표했을 텐데. 더불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을 게다. 화장실의 메모는 어떤 연유에서 나온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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