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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Jul 30. 2024

타인의 동네에서 일상을 사는 법

낯섦이 주는 이로움

이번 여행에서 꼭 하고 싶은 게 있었다. 아침 산책. 낯선 여행지에서 달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동네 주민처럼 사부작사부작 걷기. 마침 숙소 근처엔 오도리 공원이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쇼핑하고 다음 날 눈 뜨자마자 비에이, 오타루를 다녀오느라 정신없이 사흘이 지났다. 여행 4일 차, 마지막 날에야 창밖 아침 풍경이 보였다.     


오전 6시 조금 넘은 시간, 오도리 공원은 고요했다. 삿포로 도심 한가운데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이곳은 다양한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삿포로 대표 명소다. 어떠한 축제도 열리지 않는 6월 초 평일 아침, 가게도 문을 열지 않고 출근하는 이들도 집에서 나오지 않은 시간. 세상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인적 드문 공원엔 보슬비만 흩뿌린다. 누군가 잰걸음으로 공원을 가로지르다 멈춰서 셔터를 누른다. 당신도 여행자로군요. 어쩌면 그도 삿포로를 떠나기 전, 남은 시간을 쪼개 오도리 공원에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는지 모른다. 현지인에겐 지극히 익숙한 풍경을 신기한 듯 프레임에 담아 가는 여행자. 공원 동쪽 끝 삿포로 TV타워에서 산책을 마치고 나도 셔터를 누른다, 찰칵.

  

삿포로 오도리 공원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나 자신을 환기하고 싶은 마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일. 여행자로 머문 삿포로에는 내게 주어진 정체성도, 마땅히 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어서, 여행 따윈 사치였는데 막상 떠나오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잠시 잊어도,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아도 괜찮았다. 그저 할 일이라곤 낯선 동네에서 보고 듣고 먹고 걷다가 멈춰 서서 생각하는 것뿐.


여행의 유익 중 하나는 그곳에 적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지도를 손에 쥐고 원하는 목적지대로 며칠 다니다 보면 이내 길이 익숙해지는데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 여행지 구석구석 다 알아야 할 필요도, 그곳에 사는 이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다. 그들의 삶 깊이 숨겨진 문제를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가볍고 편하다. 원하는 만큼 보고 듣고 느끼다가 떠나면 된다. 그래서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여행자에게 보여주고 싶은 겉모습에 탐닉할수록 더더욱.


그러면서도 난 타인의 동네를 떠나기 전, 그곳에서 일상을 시도한다. 아무리 여행지가 매력적이라 한들 당장 정주할 수 없기에 단 며칠만이라도 현지인처럼 살아볼 기회를 찾는다. 아침에 일어나 걷거나 뛰고, 편의점에서 아침을 사 먹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작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현지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무게는 지지 않은 채 새로운 일상을 살아보는 재미랄까.



여행을 떠나오기 전, 지금 내 인생의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지 알고 싶었다. 손 놓고 넋 놓고 시간만 흘려보내기를 수개월. '번 아웃'이라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난 4년간 냅다 달리느라 지친 거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쉼이 필요하다고 읊조리다가도 차마 마음 편히 널브러져 쉬지 못하고, 그렇다고 능력치를 100% 끌어올려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해 온 일에 대한 의미를 더듬거리다가 훅 밀려오는 회의감, 무력감에 혼자 미친 사람처럼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기 여러 번.


늘 하던 일을 멀리 밀쳐내면 답이 보일 것 같았다. 매일 일정을 마치고 호텔 대욕장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조명이 켜진 TV타워를 바라보며 가만히 눈을 굴렸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끝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노골노골 피로가 녹아내리듯 시름이 사라지고 '유레카!' 외치며 물 밖으로 나오면 좋았으련만, 마지막으로 머문 카페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답은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삿포로 어느 카페


  여행은 분명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점에서도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 속에서 낯선 세계로 들어가고, 그 세계를 천천히 알아가다가, 원래 출발했던 지점으로 안전하게 온다. 독자와 여행자 모두 내면의 변화를 겪는다. 그게 무엇인지는 당장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일상으로 복귀할 때가 되어서야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내가 살던 동네가 다르게 보이고 낯설게 느껴진다.
(중략)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 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김영하, <여행의 이유> 중 '여행으로 돌아가다'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지만 적어도 삿포로에선 미뤄둘 수밖에 없어서,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꽤 많은 것들을 놓쳤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본 게 아니어서 좋았다. 덕분에 생각이 흐르는 대로 둘 수 있어 좋았다. 걱정과 불안, 조바심으로 지우개처럼 딱딱했던 마음에 작은 틈이 생겼다. 빛이 들고 바람이 오갈 작은 틈.


낯섦은 미처 몰랐던 익숙함이 얼마나 귀한지 발견하게 한다. 그것이 얼마나 세심하게 일상을 기쁘게 하는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을 때 알게 된다. 눈빛만 봐도 내 상태를 바로 알아채는 남편, 희로애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나누는 두 아들. 언제고 내 손을 꼭 잡아주는 그들이 그리웠다.

 

여행이 좋은 건 돌아갈 곳이 있어서다. 빨래를 돌리고 여행 가방을 정리하는 일은 귀찮지만 어쩌면 그런 행위가 '여행 끝, 현실 시작'이라고 알려주는 것일 게다.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삿포로 신치토세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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