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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Aug 15. 2021

"선생님, 저 광복절 노래 알아요"

선생님, 저 '광복절 노래' 할 줄 알아요!




광복절을 며칠 앞둔 아침 조회시간, 전교생이 '광복절 노래'를 제창해야 하는데 방송이 준비되지 않았단다. 음악 선생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하필 들어버렸다. 주변에 '광복절 노래'를 모두 알고 있는 학생은 나뿐이었다. 내가 선창 하겠다고 용감히 나섰다.


"다음은 '광복절 노래' 제창이 있겠습니다."

위풍당당하게 단상으로 올라갔다. 여중 시절, 난 애국조회 때마다 애국가 지휘를 했다. 매주 올라가던 길이라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반주 음악이 없었다.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지휘만 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조금 떨렸다.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시작했다. 무반주 날 것의 노래.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전교생 천 명이 넘는, 거대한 여자 중학교. 이 날따라 운동장은 넓고도 넓었다. 고요한 운동장에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광복절 노래를 따라 부르는 아이는 거의 없었다. 음악시간에도 배우지 않은 노래를 외우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무 조용했다. 갑자기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첫 음도 생각보다 높게 잡았다.


'광복절 노래'는 노래 절정에서 갑자기 옥타브로 음이 뛴다. 이걸 감안하고 노래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이히이~ 날이 사십 년




삐익.

목에서 쉰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이 고개를 숙였다. 근엄한 교장선생님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평소 웃음기 하나 없어 무섭기 이를 데 없었는데 금방이라도 불려 가서 혼날 것만 같았다. 뒷부분은 어찌 불렀는지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노래를 마치고 제 자리로 걸어 들어오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토록 멀었던가.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내가 차라리 빨간 머리 앤처럼 용감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좋았을 것을. 앤의 머리칼보다 더 붉게 물든 내 얼굴이 볼썽사나울 거라 생각하니 더 비참했다. 눈을 질끈 감고 내 자리에 섰다. 뒤에 서 있던 친구가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다.

"잘했어. 크크."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음악 담당이었다. 애국가 지휘, 합창단 반주를 시킬 학생을 고를 때 적극 나섰다. 나의 목표는 무엇이든 끝내주게 잘하는 '팔방미인'이었다. 많은 사람 앞에 능력을 뽐낼 자리가 있다면 나서라고, 딱 한 명인 리더 자리가 생기면 꼭 손들고 하라고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합창단을 해도 노래하는 단원이 아니라 반주자를 해야 한다고, 교내 대표로 뽑힐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기뻐했고 큰 딸을 자랑스러워했다.


많은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에 선다는 건 양날의 칼이다. 잘해서 칭찬받으면 어깨가 으쓱하지만 실수라도 하면 날이 서린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까짓 거 실수라고,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면 좋으련만 그러기엔 내 정신력이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 수많은 실수와 실패의 경험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난 혼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래서일까. 어른이 된 지금은 준비가 충분히 돼 있다고 확신이 들지 않으면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힐 만큼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절대 앞에 나서지 않는다. 사람들 앞에 서기까지 긴장되는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에 난 두 아들에게 '반드시 앞에 나가서 자신을 뽐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기 싫으면 억지로 할 필요 없다고 거듭 말한다. 세상 모든 걸 다 잘할 필요는 없다. 원하지도 않는 일을 억지로 잘 하려고 애쓰는 건 불행하다. 어려서 고생한 엄마 덕에 두 아들은 공부 잘하기 위해, 성적 잘 받기 위해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다. 난 아이들이 작은 일이라도 즐기면서 하기를 바란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광복절이 되면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중생이 창피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난 어떻게 그 노래를 끝까지 외웠을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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