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 Nov 27. 2021

결정장애와 완벽주의 사이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고 나니 크고 작은 어려움이 날 기다렸다. 모임 이름은 뭘로 하지? 어떤 요일이 가장 좋을까? 시간은? 공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카카오톡 단체 톡방이 나을까, 오픈 채팅방이 나을까?  피드백은 어떻게 전달할까? 정해진 공식이 있으면 그대로 따라 하련만 온라인 세상에선 자신만의 방법들이 넘쳐났다. 물론 대다수가 택하는 방법은 SNS 글 몇 개만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나름 먼저 자리 잡은 '재야의 고수'들도 분명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방법을 냉큼 '복사하기', '붙이기'를 하는 건 마뜩잖은 일이었다.


진취적이며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자유를 만끽할 테지만 안타깝게도 난 아니었다. 변화보다 안정을,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인간. 게다가 40년 넘게 다져온 결정장애가 자리했다. 진학, 결혼, 이사, 퇴사 같은 큰 일엔 대범하지만 사소할수록 결정을 못한다. 공지 포스터 메인 컬러를 노랑으로 할지, 주황으로 할지가 내겐 심히 어렵다. 아, 누가 좀 정해줬으면.


그럴 때마다 같은 집에 사는 세 남자를 부른다. 나를 아내와 엄마로 둔 죄다. "여보,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 "아들, 여기 포스터에 동그라미를 그릴까, 말까?" 처음에야 뭔가 새로운 일을 한다는 아내가 기특하고 엄마가 자랑스러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모드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도 지쳤다. 여보! 아들! 그들은 내가 호명하는 소리에 눈빛이 흔들렸고 아득한 표정마저 지었다. 흥! 됐다고. 망해도 내가 한다고!



© vonshnauzer, 출처 Unsplash


도대체 결정하는 게 왜 이리 힘들까. 두 가지 선택지를 모두 택하고 싶은 욕심, 이것도 저것도 좋을 것 같아 포기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이 단호한 결정을 막는다. 옷을 고를 때 두 옷 사이에서 고민하는 건 둘 다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어서다. 한 친구는 내 고민을 이렇게 날려버렸다. "뭘 고민해. 둘 다 사!" 얘야, 그건 아빠 카드를 한도 없이 쓰는 네 경우고, 빠듯한 용돈 안에서 최선의 가치를 얻어야 하는 나는 아니란다.


또 하나는 내 손에 쥔 두 선택지 외에  더 나은 사안이 있을 것 같은, 완벽을 향한 욕심이다. A와 B를 두고 고심하다 슬그머니 C와 D를 찾아 나선다. '최선'이 세상 어딘가 숨어있을지 모르는데 어찌 두세 가지 중에 결정할 수 있나. 그러다 보면 계획한 시간을 훌쩍 넘어 인터넷 세상에서 길을 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까지 해결해야 할 일은 어느새 내일 할 일로 쌓여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홀로 결정해야 하는 나 같은 이를 두고 '1인 기업'이라고 한단다. 아직 '기업'은 아니지만 '1인'의 외로움은 통감한다. 누군가 옆에서 내 마음을 찰떡같이 알아 조언해줬으면, 단순 노동은 누가 알아서 처리해줬으면,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누군가 슬쩍 던져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살면서 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이토록 많았던가. 가정과 학교에서 정해준 대로 따르면 성실하다 칭찬받던 20세기 모범생에게 무엇이든 알아서 결정하는 일은 매일 수능을 보는 것과 같은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 geralt, 출처 Pixabay


이어령 선생은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돼라."라고 했다. 실패가 두려워 시키는 대로, 정해진대로 살면 내 삶이 없다는 건 이미 안다. 일단 과감하게 해 보면 될 일인데 사소한 실수조차 버거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다. 선택은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선택하면 책임져야 한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판단하고 선택하고 기꺼이 책임지는 일일 게다. 설사 결과가 내 마음과 같지 않더라도, 실망하고 좌절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한두 번 실수와 실패에 삐지고 웅크리기보다는 잘 못할 수도 있다고 토닥거리며 꾸준히 초심을 잃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윤홍균 작가는 <자존감 수업>에서 결정을 잘하려면 내가 결정하는 범위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결정에 대한 고민은 현재, 나 자신의 범위에서일 뿐 미래를 결정할 능력이 내겐 없다. 또 하나, 세상에 '옳은' 결정도 없다. 어떤 결정을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이후 어떻게 하느냐다. "이렇게 할 걸 그랬어"라고 후회하는 대신 한 번 정한 일에 집중하고 매진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매번, 매 순간 결정을 힘겨워하는 내게 남편이 말한다. "잘하고 있어. 당신의 결정을 믿어. 아니라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구구절절 맞는 말,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난 요즘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모임은 이렇게 시작됐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